몽니

by 김대일

치렁치렁한 숱에 구레나루까지 덥수룩한 채로 이발 의자에 앉아서는 계속 기를 거니 살짝 정리만 하라고 주문하는 손님(거개가 젊은 축이다)은 까다롭다. 살짝만 정리하라는 그 가이드라인이 명확하지 않아서 더부룩한 숱을 솎아 내려고 숱가위를 들면 손사래를 치질 않나 잘라낸 머리털이 약간이라도 많다 싶으면 작업을 중단시킨 뒤 거울 보기 바쁘다. 이들은 또 점방 문을 나설 때까지 깎새를 긴장시킨다. 결코 두말없이 나가는 법이 없어서다. 커트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머리를 감고 나서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이 됐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데 여의치 않으면 여지없이 수정을 요구한다. 그게 너무 성가셔서 깎새는 손님이 물러날 때까지 온 심혈을 기울여 작업에 열중하는 한편 팽팽한 신경전에도 대비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그깟 오천 원 벌겠다고 이리 소모적이어야 하는가 회의와 피곤이 밀물처럼 밀려오지만 그 수고로움도 아랑곳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클레임을 걸면 그 손님 면상에다 굵은 소금이라도 확 뿌리고 싶은 심정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발이 머리털을 깎고 다듬는 걸 의미한다면 이발소에 와서 깎고 다듬을 생각은 않고 찔끔찔끔 매만지기만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솔직히 가소롭고 가당찮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쥐좆만큼 두발정리를 했다고 해서 유명짜한 엔터테이너의 때깔나는 머리처럼 멋져 보이기는커녕 짝퉁도 그런 저질 짝퉁이 없을 만큼 하찮아 보이건만 그 자뻑은 도대체 어디서 기원한 만용인가. 정 원한다면 차라리 머리 한 번 매만지는 데 수만 원을 호가하는 번지르르한 미장원이나 바버샾으로 가면 될 터인데 요금 오천 원짜리 박리다매 커트점에 와서 갖은 유세 부리는 게 과연 합당한 처사인가.

한 번씩 염장을 다 헤집는 손님이 왔다 가면 일손이 잘 안 잡힌다. 손님 한 사람이 아쉽긴 해도 그런 손님은 다시는 아니 보길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일요일 낮에 구레나루가 짝짝이가 됐다느니 옆머리를 덜 깎았다느니 군소리를 쫑알거리면서 듣는 사람 무안하게시리 한숨까지 푹푹 쉬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손님이 계좌이체로 요금을 계산하고 나가려고 할 때 내가 부린 몽니는 일종의 소극적인 저항이다. 송금했다면서 점방 문을 막 나서려는 손님을 "아직 안 들어왔는데요"라고 반박한 뒤 가로막았다. 실은 들어와도 진작에 들어왔는데 말이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던데 어쩔 텐가, 받을 사람이 아직 입금 전이라고 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영겁 같은 몇 초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못마땅한 시선을 줄곧 쏘아대건 말건 입금 메시지가 들어왔는지 휴대폰 화면만 응시하던 깎새의 입에서 마침내 "고맙습니다"가 떨어지자 뒤도 안 돌아보고 휙 나서는 손님. 그 뒷모습에다 대고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소곤대며 뒤끝 부리는 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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