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눈길을 끄는 소설이 있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박생강, 나무옆의자, 2017)는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자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극중 화자(등단한 소설가로 나오는데 실제 작가의 페르소나인 셈이다)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대한민국 1% 부자들이 다니는 신도시 한 고급 피트니스 사우나의 매니저로 일하게 되고 거기서 겪게 되는 '갑'의 세계를 그려낸다. 경쾌한 필체로 쓰여져서 어렵지 않고 군데군데 유머까지 탑재되어 있어 술술 읽혀진다. 그럼에도 어느 대목에 이르자 목에 걸린 가시로 괴로워하듯 쉽사리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격앙한 나는 오래지 않은 과거 속 나를 극중 화자와 동일시하고야 말았다. '오야붕'이라는 별명을 가진 피트니스 회장의 등장 장면이었지 싶다.
나도 한때 사우나·찜질방에서 일한 적이 있다. 사우나·찜질방 전반을 관리하는 과장 역할은 사우나 매니저인 소설 주인공보다는 높은 직급이었는지 몰라도 소설 속 대한민국 1% 부자만큼이나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회장을 위시한 이른바 로얄 패밀리의 횡포에 마음 고생은 훨씬 심했었다. 대신 2년을 못 채우고 회사를 떠났음에도 나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사람은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을 던졌던 시기였고 퇴사 이후의 삶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연속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하여 언제고 꼭 불망기를 남겨 당시를 기념하고자 스스로 다짐했다.
로얄패밀리의 천박한 상전 놀음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고 해서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앙심으로 그것만을 부각시키려는 짓은 경계해야 한다. 감정의 찌끼만을 배출하는 글을 쓰기에는 들일 내 용력이 너무 아까울 성싶어서다. 그보다는 사우나·찜질방과 거기에 딸린 레스토랑(부산 해운대에서는 꽤나 유서깊은 곳이다)에 기생했던 인간 군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야말로 글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사료된다.
사우나가 배경인 소설이 이미 등장했으니 내가 쓴 글은 그것의 아류에 불과할 테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았던 당시 경험담을 망각의 쓰레기통에다 내던져 버리고 싶진 않다. 다만, 기록을 남기자면 선행되어야 할 게 있다. 당시 사우나를 관리하는 회사에 나를 천거한 용이가 내 시도를 용인해야 한다. 지금이야 이직해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의 어엿한 총괄 책임자로 변신해 전 회사와는 무관하지만 2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회장을 모신 충성스런 참모였던 그였으니 본격적으로 회장과 그 일가를 얘깃거리로 삼는다면 불편해하지 말란 법 없다. 거기에다 유난히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녀석과 내 기억을 대조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지만이 혹시 모를 누락이나 왜곡을 방지할 수가 있다. 하여 내 시도가 가시적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리라 자부한다.
사우나·찜질방 근무할 당시 겪었던 일화를 글로 남긴 적이 있다. 쓴 지 오래된 글이라 시시껄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곳을 배경으로 앞으로 쓰려는 글의 일단이 엿보여서 보기 삼아 다시 게시한다.
<내 마음 속 시네마 천국>
해운대 한 사우나·찜질방 관리과장으로 적을 뒀던 2015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외지인들 사이에서 이름난 부산 여행지 중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언덕 길목에 터줏대감인 양 턱하니 자리 틀고 앉은 사우나·찜질방 건물은 탁 트인 해운대 바다를 배경 삼아 인생 사진 한 컷 건지기 안성맞춤인 곳으로는 더할 나위 없다고 회자된 덕에 건물주가 갈퀴로 돈을 긁었던 때가 있었다. 널린 게 핫플레이스인 요즘에야 드나드는 관광객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그 지정학적 명성은 여전하다.
피자란 걸 부산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 팔았다는 레스토랑 건물과 한데 묶어 새 주인에게 팔린 직후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이뤄진다. 부산에 적을 둔 신발 제조회사의 창업주이기도 한 새 주인은 해운대 지역을 넘어 부산의 랜드마크로 사우나·찜질방 건물을 부상시키겠다는 당찬 포부를 제일성으로 밝힌 뒤 일흔이 넘은 노구임에도 동분서주했드랬다. 자타가 공인하는 막강 재력을 보유한 노老회장께서는 만방에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픈 욕구가 지나친 데다가 이를 노린 하이에나 같은 아부꾼들의 교언영색에 너무 쉽게 쫑긋거리는 팔랑귀의 소유자이다 보니 리모델링 공사는 애당초 계획과는 달리 점점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으로 변질되었다. 제 논에 물 대겠다는 노 회장 전횡에 피가 거꾸로 솟는 더러운 기분으로 밤잠 설친 실무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후문이지만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들어가 일 년 남짓 근무하다 관둔 나는 제멋대로인 노욕 덕분에 오히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호사를 누렸으니 그 은혜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어깨를 겯은 듯 사이좋게 해운대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레스토랑과 사우나·찜질방 건물 뒷편으로 건물 면적만 한 주차장이 자리잡고 있다. 방문객 차량을 주차시키는 건 물론이고 바다를 조망하는 또 하나의 전망대 역할까지 맡은 공간으로 그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사우나·찜질방 건물 외벽은 네모반듯한데다 노 회장이 최애한다는 아이보리 톤으로 말끔하게 칠해져 있어 마치 영화관 대형 스크린을 방불케 했다. 얼핏 듣기로 공사 독려 차 현장을 순시할 적마다 노회장은 그 외벽이 계속 눈에 밟혔다나. 리모델링으로 얻게 될 경제적 효과에 그 외벽도 일익을 담당하길 바랐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마음뿐이었다고. 그러던 중 가려운 차에 등 긁어준다고 누군가가 영감을 들쑤셨는데 그 발상이 참으로 기발했다. 난데없이 주차장에 대형 빔프로젝트를 설치하라는 엄명이 떨어졌고 번갯불에 콩 볶데끼 후다닥 세워졌다. 나는 그처럼 고성능이면서 대형인 빔프로젝트를 난생 처음 봤다. 스쿠버다이버가 유영하는 바닷속을 담은 광고 영상 한 토막을 시험 삼아 띄웠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장관이었다. 입체영화를 보는 느낌이 아마 이럴 게야. 화면으로 빨려들어갈 것처럼 몰입도는 최고조에 달했고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경이로운 문명의 이기로고!
노회장 주변을 알짱거리던 아첨꾼 하나가 묘안이랍시고 꺼낸 아이디어는 이랬다. 밤이면 밤마다 빔프로젝트로 영화를 상영하면 달리 노천극장이겠습니까. 광고비로 애먼 돈 쓸 것 없이 건물 외벽을 스크린 삼아 영화를 상영하는 사우나·찜질방으로 입소문만 타면 해운대 명물로 짝자그르할 테고 사우나·찜질방은 물론 레스토랑에까지 손님이 몰려 매상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라 이것이야말로 일타쌍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 아니겠습니까. 그럴싸하다고 여겼음인지 팔랑귀 회장님은 그길로 용단을 내렸던 게고.
막상 설치는 했지만 상영으로 인해 생길 변수에 대비하려고 아랫것들은 이른바 점검 회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작권이란 단어가 불거졌고 여차하면 탈탈 털리기 십상이라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저작권법 위반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저작권 협회다, 영화 상영 관련 협회다며 자문을 구하느라 부산을 떨었고 대형 스크린 걸어놓고 장사하는 음식점까지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동안 조사를 하고 다닌 뒤 최종보고라면서 올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영은 자유지만 제작된 지 70년(60년인지 헷갈리는데 아무튼)이 넘어 과연 한번이라도 영사기를 돌리기나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생소해서 왜 남의 영화를 함부로 트냐며 소송에 휘말릴 소지가 거의 희박한 영화라면 뒤탈 염려를 그나마 덜 거란 전언.
빔프로젝트 멋모르고 돌렸다가 된통 당하느니 없던 일로 하자는 둥 기왕에 장치까지 설치했으니 영화관 시늉은 내봐야 하지 않겠냐는 둥 갑론을박 난상토론 끝에 상영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지만 은막에 뭘 띄울 거냐는 문제에 다시 봉착하게 된다. 내 일 아니라는 듯 1960~70년대를 풍미하던 영화 제목이나 들먹이던 아랫것들은 이런 거 해결하라고 관리과장에 앉힌 거라면서 그네들보다 더 아랫것인 말단 과장한테 뜨거운 남자를 넘겼다.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투덜거리기는커녕 쾌재를 부른 나였다. 그 결정이 얼마나 나를 흥분시켰는데! 바닷물 흠뻑 머금은 해풍으로 후텁지근한 2015년 한여름밤을 한 편의 낭만적인 영화로, 그것도 내가 직접 튼 영화로 수놓는다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몇 날 며칠 동안 인터넷을 뒤진 끝에 제작년수, 인지도, 민원 발생 여부 등에 관한 내부 사전 심의를 통과한 한 편의 영화가 빔프로젝트의 빛으로 재생되던 날, 나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로 빙의했다.
아이보리색 외벽 스크린에 흑백의 거대한 움직임이 나타나자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잿빛 배경 속에서 생동하는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압도되고 매료된 채 외벽만을 줄곧 응시하는 관중을 바라보며 불과 50초짜리 열차 도착 장면만으로 세상을 경악시킨 뤼미에르 형제가 느꼈을 희열을 알아챘다. 그러자 나는 고무됐다.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이 괴팍한 부옹의 청지기나 하는 신세지만 내 인생은 그깟 돈보다 훨씬 아름다울지니 이 순간 나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리라. 소리, 색채 모든 걸 소거 당한 초라한 흑백무성영화가 검열로 잘린 장면장면을 이어붙인 ‘키스신 퍼레이드’에는 못 미친다 할지라도 오늘만은 내가 알프레도도 됐다가 토토도 되었다고!
한동안 똑같은 영화가 똑같은 시간에 상영되었다. 소리를 잃어버린 배우들이 타성에 젖은 양 어제와 똑같이 뛰고 자빠지고 웃다가 울 뿐이었다. 스크린은 점차 생동감을 잃어갔고 넋 놓고 탄성을 자아내던 구경꾼들은 은막의 주인공이 펼칠 다음 액션을 안 보고도 줄줄 되뇌다 심드렁하게 한 마디 툭 내뱉고는 자리를 떴다. ‘틀지나 말지. 칙칙한 흑백무성이 질리지도 않나 몰라.’ <빔프로젝트 영화 상영 프로젝트> 완수 직후 몇 달 뒤 나는 퇴사했다.
거대한 스크린 속 무성배우들의 슬랩스틱이 여전히 요란스러운지 궁금하다. 예상했던 매상 증가는커녕 밤마다 틀어대는 흑백화면이 을씨년스럽다는 동네 주민들 민원에 격노한 노회장이 철거를 아예 명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큰딸이 동영상 공부하다 머리 식힐 겸 눈요기하던 화면에 《시네마 천국》의 낯익은 장면이 나타나 문득 만감이 교차해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