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TV 보는 법

by 김대일

점방 TV를 켜면 퇴근할 때까지 안 끈다. 한시라도 아니 보면 입이 아닌 눈에서 가시가 돋는 TV 시청에 환장한 놈처럼 말이다.

각자 바쁜 네 식구가 TV 앞에 옹기종기 다 모일 겨를이 없을 뿐더러 손 안의 스마트폰이면 TV 아니래도 시간을 재미지게 때울 수가 있으니 켜져 있을 때보다 꺼져 있을 때가 더 흔한 우리집 TV다. 그러니 시류에 편승할 TV 프로그램에 둔감하고 본방 사수 따위 선동 언어로 시청률을 올리려는 방송국 꼼수에도 쉽사리 놀아나지 않는다. 즉, 우리집 바보상자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런 내가 점방에만 갔다 하면 퇴근할 때까지 TV를 안 끈다.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리모컨을 한쪽 손에 꽉 쥔 채 브라운관을 뚫을 기세로 TV에 빠진 내 모습은 환장한 놈 그 자체라 내가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TV라는 타성에서 헤어날 기미가 도무지 안 보인다.

그 시간에 책을 보라고 하면, 손을 쭉 뻗으면 잡힐 선반 위에다 일부러 진열해놓을 만큼 책을 멀리하지 않음에도 손이 막상 안 가는 까닭이 점방이란 공간 자체가 독서 여건으로는 적합하지 않아서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겠다. 소득 창출의 최전선인 점방에서 오로지 정신일도하는 데라곤 드나드는 사람 확인하려고 점방 문에다 매달아 놓은 딸랑이뿐이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책장 넘기기가 어디 쉬울까. 차라리 우공더러 이산을 하라는 게 더 쉬울 수도. 그 점방 문과 거의 수평으로 위치한 TV 브라운관에다 시선을 고정해 놓고 있는 게 심신 안정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둘러대면 핑계 같지 않은 핑계일까. 쳐다보면 볼수록 멍해지는 TV 대신 라디오를 틀까 고민해봤지만 대기석에서 기다리는 손님 입장이 되어 보면 왜 하루 죙일 TV를 켜 두고 공과금 내듯 매달 꼬박꼬박 구독료를 지불하면서 신문을 받아보는지를 이해할 거라면서 돼먹지 않은 짓 하지도 말라는 부친의 엄중한 경고에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모지리 대통령과 그 일당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뒤로는 정치 관련 프로는 선호 채널에서 아예 지워 버렸다. 대신 넋 놓고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예능 프로만 찾아 헤매는 리모컨 놀음을 즐길 뿐이다. 예능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는 채널엔 특징이 있다. 낮에 방송되는 예능은 본방이 아닌 거진 재방이다. 재방은 최근 방송분부터 오래된 것까지 무궁무진하고 어떤 프로는 시청자들이 재밌어 했던 에피소드들만 쏙 뽑아 방송하는 잔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재방은 한 채널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같은 방송국 자매 채널이 있으면 거기로 넘겨서까지 재방이 이어진다. 바야흐로 한낮의 TV 세상은 '재방 천하'인 셈이다. 그렇게 주야장천 재방만 보고 앉았으니 정작 본방 시간은 모르면서 재방 편성표만 꿰찬 게 그리 이상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늘 배가 고픈 아귀처럼 보면 볼수록 허해지는 게 TV 예능이더라. 그러다가 결국 질려 버렸다. 내로라하는 끼쟁이들이 그들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팍팍한 일상을 매끄럽게 해주는 윤활제로써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하지만 시시껄렁한 잡사는 별로 안 웃기고 그들만의 리그인 양 저희들끼리 떠들고 웃고 자빠진 예능프로그램에 환멸을 느껴 버리면 미련없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다. 순간 오래된 무성영화의 음성을 잃은 배우들이 벌이는 슬랩스틱처럼 그들은 전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지만 그런 그들을 나는 끝내 외면하고 만다. 손님이 입장하면 그 적막감을 지우려 음소거를 해제하지만 나는 이미 무감각, 무신경의 경지에 들어선 뒤다.

하여 요새는 TV 프로그램 저변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왕 보는 TV라면 속시끄럽고 귀 따가운 건 그만 지양하려 한다. 정신 사나운 연예인의 수다 대신 절제된 내레이션이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고 현란한 카메라 워크 대신 순박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시키는, 모르는 사람의 심상한 일상이나 순진무구한 자연과 동물의 세계가 등장하는 그런 프로그램이면 음소거 버튼을 누르는 일이 지금보다는 덜할지 모른다.

평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님들로 번잡한 주말은 TV보기가 여의치 않지만 꼭 그런 날 볼 만한 프로가 몰려 있다. 토요일은 <걸어서 세계 속으로>, <백투더 뮤직>, <팔도밥상>, <사랑의 가족>, <이웃집 찰스>, <자연의 철학자들>, <동물의 왕국>, <동행>으로 이어지는 KBS1 라인업이면 하루가 금세 간다. 일요일은 KBS2의 <영상앨범 산>을 필두로 <TV 동물농장>, <TV 진품명품>, <베링해의 왕게 전쟁>, <이것이 야생이다>를 보러 KBS1, SBS, EBS를 종횡무진 누비련다. 리모컨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붙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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