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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by 김대일

저녁 6시 반쯤 되면 염색볼, 브러시 따위를 미리 씻어 버린다. 7시 마감 전이라도 커트야 커트보만 두르면 일사천리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지만 염색은 번거롭다. 염색하러 오는 손님은 거개가 커트와 염색을 병행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더디 간다. 커트 10~15분, 염색 바르는 데 5분, 염색 물 드는 데 20분, 샴푸하고 정리하는 데 5분. 제 아무리 손이 빨라도 40분은 족히 걸리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마감이 코앞인데 염색을 해달라고 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눈치없는 손님을 보면 매상은 둘째치고 짜증부터 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동네 장사하는 주제에 손님한테 배짱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손님을 받긴 하지만 지연되는 퇴근 시간 만큼 이는 적대감을 가누기는 힘들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정해진 퇴근 시간을 무조건 지키려는 루틴이 맹목적인 반복에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 장사치 일상(샐러리맨도 마찬가지겠지만)에 활력을 불어넣을 유일무이한 자구책이라고는 퇴근 후 휴식시간을 가급적 많이 취하는 것밖에 없다는 거의 강박관념이나 다름없는 신념에서 비롯된 바 손님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는 중에도 초조함에 파르르 떨리는 눈길로 벽걸이 시계를 연신 바라다보는 7시 전후의 내 모습에 의아해해서는 안 된다. 공식적인 폐점 시간인 7시 반에 정확하게 점방을 나서도 집에 도착하면 9시 언저리여서 퇴근이 늦을수록 그 시간만큼 저녁식사도 늦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마저 늦어진다. 곧 죽어도 6~7시간 수면을 원칙으로 삼은 마당에 다음날 새벽 5시 일어나 일정을 시작하려면 늦어도 1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남들이 '애걔, 꼴랑 10~20분 가지고' 할 그 지연된 퇴근시간 때문에 헝클어지는 루틴은 나로서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감 전 염색 손님은 웬수다.

월요일 마감하기 전이었다. 전날 예상하지 못한 성황으로 무리를 해서인지 몸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음날이 쉬는 화요일이니 집에 가서 잠자리 들기 전에 쌍화탕이라도 마시고 다음날까지 푹 쉬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마감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6시 반쯤 염색 용기는 미리 씻어 둔 상태였고. 그런데 6시 50분쯤 점방 문이 열렸다. 머리 색깔부터 가늠했다. 낌새가 수상했다.

"염색까지 하실 겁니까?"

"예."

"염색은 마감했는데…"

"아, 그래요? 그럼 내일 다시 올까요?"

"그러시죠. 내일 잘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은 좀 일찍 오죠."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나가고 한 5초쯤 흘렀을까. 아차, 점방 문을 박차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홀연히 떠난 손님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쉬는 날인데. 또 헛걸음할 손님을 떠올리자니 퇴근하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 화요일 낮에 점방엘 들러 볼까?

- 들러 본들 그 손님이 언제 올 줄 알아서 기다릴 거나.

- 사람 가지고 논다고 열받겠는데.

- 멍청하게 굴다 단골 손님 한 명 놓친 게야.

불쑥불쑥 떠오르는 월요일 잔상 때문에 쉬는 날 쉬는 것 같지도 않게 찌뿌드드했다.

수요일 오전 염색하겠다면서 손님이 들어왔다. 바로 그 손님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연신 조아렸다. 다행히 점잖은 손님이라 불문에 부쳤지만 볼일 다 보고 점방 문을 나설 때까지 내 입엔 "죄송합니다"가 달렸다.

루틴도 좋고 신념도 좋지만 앞뒤 가려가면서 내세워야 한다. 빌어먹을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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