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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by 김대일

사달이 난 까닭은 제각각이어도 결말만은 똑같은 악몽을 가끔 꾼다. 학기를 다 마쳤는데도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못해 화들짝 놀라 깨는 꿈. 4년 내내 빈둥거리다가 어영부영 졸업한 지난날의 업보인 성싶어 씁쓸하다. 그제 꾼 꿈도 스토리 진행이 창의적이질 못했다. ROTC로 졸업할 경우 필수과목인 군사학을 이수해야 하는데도 그걸 까맣게 잊어버린 채 커리큘럼을 짜놓고선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하다 잠을 깼다.

당신 일에 정신이 팔려 불가피하게 수수방관했을 뿐 자식의 진로를 당사자에게 맡기는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파격적인 학부모 운운하는 건 큰 착각이라면서 당시 별정직 5급 동장 업무에 치이지만 않았어도 돈 안 되는 국어국문학과로 진학시킬 일은 결단코 없었을 거라는 부친의 고백으로 지금껏 품었던 부친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깨졌지만 어찌됐든 저찌됐든 그 덕에 가고 싶은 학과에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는 행운을 누린 것만은 내 복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 하고 싶었던 것들 중에 유독 공부만 빠져 있었던 탓에 졸업 못하는 악몽에 시달리는 것 역시 팔자려니 여길밖에.

글쟁이가 되고 싶었으면 차라리 문예창작과를 들어갔으면 되었을 것을 그때는 그런 과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내 과문함은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이왕 우리말과 글을 가지고 놀 양이면 국어국문학과가 안성맞춤이겠거니 자위하면서 시작한 대학 생활은, 그러나 창작과는 거리가 먼 교조적이면서 근본주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학과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데다 완고한 기풍에도 불구하고 백일장 수준을 뛰어넘는 심상찮은 글재주로 두각을 드러내는 동기들을 보면서 길을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다고 제풀에 기진해 버린 뒤로 학과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말았다. 아니,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에 편승하긴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대학교 공부는 내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재간이 없다고 직감하자마자 포기했다는 게 더 솔직한 답변이겠다. 언어학은 이해불가였고 국어학은 다른 나라 말 같았으며 시론은 언감생심이었고 소설론은 철옹성이었다. 국어국문학사로 먹고 살 궁리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교양인이라면 갖춰야 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기본 소양조차 부실한 채 4년을 덧없이 허비했고 남은 거라곤 알량한 졸업장과 군 입대였다. 전역 후 얼마 안 가 IMF 직격탄을 얻어맞긴 하지만 호황의 막차에 무임승차한 덕에 취직은 수월했다. ROTC 출신 전역자라는 프리미엄이 학점이나 스펙보다 더 위력적이었던 당시여서 '무임승차'는 나한테만은 적확한 표현이다. 그러고 보면 살아온 이력 자체가 요행수의 연속이었다. 만사태평으로 신간 편하게 '먹고대학생' 노릇으로 일관하다 운좋게 육군 장교로 전역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속 빈 강정인 주제에 굴곡 없이 금융회사 취직해 따박따박 월급 받아 술 마시고 연애질로 허랑방탕하게 탕진해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건 그 무엇 하나 직접 일군 거 없는 공짜배기 습성이 몸에 밴 까닭이었으리라. 수틀리면 "살면서 제 힘으로 해놓은 게 있음 어디 내놓아 보라"는 마누라 구박에 달리 응수할 거리를 못 찾는 원죄이기도 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역설한 "꿈은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실현시키지 못한 소망들을 충족시킨다. 꿈은 우리가 가진 소망들의 완전한, 명백한 실현이다"를 금과옥조로 여긴다면 학점을 못 따 졸업을 못할 지경에 이르는 악몽은 여지껏 설렁설렁 살았던 내 인생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임은 물론 남들 앞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심중의 소망을 실현시키겠다는 욕망의 다른 발로일지 모른다. 아흔을 넘긴 만학도 이상숙(92)씨가 국내 최고령 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보름 전에 접했는데도 마음은 여직 술렁이고 있다. 더군다나 사숙하던 고故 신영복 선생이 교수로 재직했던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딴 박사라 더 의미깊게 다가온다. 내 욕망은 공부다. 무얼 공부하기 이전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데 '전심전력', '전력투구'라는 성어에 보다 진심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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