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명의로 된 건물을 관리하는 아들은 내가 아는 한 다들 고단해 보였다. 직업상담사랍시고 잠시 적을 뒀던 직업학교가 세든 건물의 관리인은 혈기 방장한 젊은이였다. 찌는 듯한 한여름이었는데 에어컨 없는 건물 외진 골방에서 웃통 다 벗어젖히고 틀어봐야 뜨거운 바람만 부는 선풍기 앞에서 더위를 식히던 중이었다. 갑자기 건물주인 대머리 중년 아저씨가 들이닥쳐서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퍼질러 앉았다고 임차인들 뻔히 보는 앞에서 어찌나 호통을 질러 대던지 내가 다 남우세스러울 정도였는데 알고 봤더니 부자지간이라나. 남 시선일랑 아랑곳없이 불같은 성미를 드러내는 건물주도 예사롭지 않았지만 동네 헬스장 VIP인 성싶게 단단히 화가 난 근육을 자랑하는 우락부락한 몸매를 가진 젊은이가 아버지 앞에서 끽 소리도 못하고 납작 엎드린 모습은 살면서 봐왔던 몇 안 되는 괴기스런 장면 중 하나였다.
평일 오후 서너 시는 직장인들이 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퇴근하는 길에 들렀다면서 보름에 한 번꼴로 커트와 두피마사지를 받고 가는 손님은 얼추 깎새 또래다. 자주 찾는데다 유들유들한 호인상이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이런저런 객담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제 왔을 때 건물 관리인이라고 밝힌 자기 직업의 이면을 들을 기회를 얻었다.
정정한 90세 부친 소유인 서면, 대연동 대학가, 사상, 세 곳 중 두 곳의 건물을 관리하는 삼형제 중 장남이라는 손님이 내 눈에는 차기 갓물주의 위엄은커녕 박봉의 고단한 월급쟁이로밖에는 비춰지지 않았다. 지역만 나열해 감이 안 오실 분을 위해 부연하자면 세 곳 다 부산 노른자 땅이다. 서울로 치자면 서면은 명동, 대연동 대학가는 신촌, 사상은 서울 지하철 3호선 고속버스터미널역 부근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란가. 암튼 손님 넋두리를 그대로 옮기자면, 건물 관련해 온갖 잡무를 혼자 떠맡지만 받는 월급이라고는 겨우 2백만 원 남짓이라 부친한테 맺힌 게 참 많단다. 공대를 나온 인텔리로 진해 소재 대형 조선소 협력업체에서 자리잡고 잘 살던 자기를 꼬드겨 사상 건물 3층에다 술집을 차리라고 부친이 하도 강권을 해 진해 생활 청산하고 여윳돈에 퇴직금까지 몰빵했지만 정작 허가가 나오질 않아 술장사는 무산이 됐다. 그냥 나오자니 들인 돈이 아까워 울며 겨자먹기로 당구장으로 업종을 바꿔 개업했지만 월세 250만 원을 꼬박꼬박 부친한테 헌납하고 나면 빛 좋은 개살구 신세였다. 무엇보다 술집 무산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을 지지 않는 부친이 섭섭하기 그지없었다고. 동생이 그 건물 4층에다 PC방을 열고부터 건물 관리까지 겸하게 되었지만 그 녀석도 예외없이 부친께 꼬박꼬박 월세를 내고 있다. 사상 건물만 보면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서 그쪽으로는 발길이 잘 안 간다고 한다.
허가가 안 나오는 술집 개업에 목을 매느니 진해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극대노를 하는 바람에 당구장을 차렸지만 부친한테 월세 헌납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헛장사에 재미를 못 붙여 아예 다 막살하려고 하자 부친이 급히 마련한 게 월급 2백만 원짜리 건물 관리자 자리였다. 남 속도 모르는 친구들은 부친 밑에서 갓물주 경영 수업을 받는 줄 알고 부러워하지만 잡무는 잡무대로 넘치는데 단 십 원도 오른 적 없는 2백만 원 월급으로 식구 건사하는 현실에 늘 자괴감이 들 뿐이다. 물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자기 몫의 유산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무슨 낙으로 버티겠는가. 허나 이마저도 조마조마하다. 여자라면 마누라도 안 믿는다는 철저하게 남성 본위의 가부장적 사고가 지배적인 부친이라서 삼형제 중 유일하게 손자를 낳지 못한 불리함이 제 몫의 상속분을 깎아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할지 모른다고 늘 불안해한단다. 자식한테 돌아가는 상속분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냐고 훈수를 뒀더니 그걸 모르는 바 아니나 부친의 기질 상 손자가 아닌 손녀한테 당신의 알토란 같은 부동산이 넘어가는 것에 몹시 부정적이라 그렇다고 하니 더 할 말을 잃었다.
여우 같은 임차인과의 대결에서 우이를 점하자면 그들보다 더 독해져야 하니 후계자답게 모진 갓물주로 개조시키기 위한 의도된 경영 수업이라고 하면 그들만의 방식이겠거니 받아들이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피붙이끼리도 인정사정없이 굴어서 얻는 그 수완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값진지 나는 잘 모르겠다.
* 덧붙이는 말- 순전히 손님 말만 듣고 재구성한 글엔 허점이 많다. 손님이 주워섬긴 요설은 대체로 그의 머릿속에서 첨삭을 가한 편집본일 공산이 크다. 하여 부친의 이미지를 액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손님 부친의 처세관이랄지 자녀관은 손님이 씨월거린 걸 고대로 인용했다는 점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