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지난 주에 이어 신영복 선생 글을 또 인용한다. 요새 신영복 선생 저서를 다시 꺼내 읽는 중이긴 하다. 다시 읽는 선생의 글은 이전과는 또 다르게 읽힌다. 묵직한 뭔가가 스며든다고나 할까.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틀을 깨뜨리기 위해 시를 읽어야 한다는 선생의 말씀을 곱씹으며 선생 저서 『담론』의 한 대목을 옮긴다.
시는 문사철과 마찬가지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어詩語는 그 언어의 개념적 의미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메타 랭귀지meta language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도현의 '연탄재'는 연탄재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아낌없이 불태운 사람의 초상입니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 시인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는 언어의 일반적 의미를 살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시는 가장 개인적인 언어로, 가장 심층적인 세계를 가장 무책임하게 주파하는 장르라고 합니다. 그에게 시는 근본에 있어서 랑그Langue가 아니라 파롤Parole인 것이지요.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전복하고, 상투적인 언어를 전복하고,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카타콤catacomb이며 그 조직 강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간장게장을 먹다가 문득 게장에 콜레스테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하다가 '간장게장'에 관한 시를 발견합니다. 시제는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간장이 쏟아지는 옹기그릇 속에서 엄마 꽃게는 가슴에 알들을 품고 어쩔 줄 모릅니다. 어둠 같은 검은 간장에 묻혀 가면서 더 이상 가슴에 품은 알들을 지킬 수 없게 된 엄마 꽃게가 최후로 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간장게장'은 이미 간장게장이 아닙니다. 그 시를 읽고 나서 게장을 먹기가 힘듭니다. 엄마 꽃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신영복,『담론』, 돌베개, 2015, 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