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화요일 낮에 큰딸이랑 낮술을 즐겼다. 발단은 아침에 마누라가 회사까지 차로 바래다 달라는 데서 시작됐다. 차간에서 마누라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큰딸은 복학은 안 하고 간호학과 편입 준비하겠다면서 올 한 해를 또 통째로 올인한다지를 않나 막내딸은 펜싱이 힘들어 중학교로 돌아가고 싶다질 않나 환장할 노릇이라면서 말이다. 특히 큰딸에 대해서는 재작년부터 두 해씩이나 약학대학원 편입에 공을 들였는데도 뜻대로 안 됐고 휴학한 김에 따라고 지원해준 운전면허시험도 중도에 흐지부지 말아 버리니 이건 숫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거나 다름없다고 울상이었다. 게다가 대학 나와도 2백만 원이고 알바해도 2백 만원인데 복학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말을 스스럼없이 지껄이는 데는 기가 막힐 노릇이란다. 알바하는 곳에다 꿀을 발라 놨는지 새벽 2~3시 문 닫을 때까지 붙어있다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것도 못마땅하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다가 불똥이 나한테로 튀었다. 애들이 이 지경인데 눈곱만큼도 신경을 안 쓰는 무심한 아비로 몰아가면서 큰딸이 요새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 딴답시고 학원 다니는 걸 아냐고 물었다. 틈틈이 애들과 소통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데도 알아주질 않는 마누라가 섭섭했지만 큰딸 최근 근황은 금시초문이라 유구무언이었다. 주말마다 서면 학원까지 가서 배워 오면 연습을 해야 하는데 집에 하나 있는 노트북은 느려 터진 데다가 잔고장이 많아 새로 사든지 무슨 수를 써야겠어서 제발 좀 나서 보라며 러시아워로 찻길에서 1시간 가까이 끙끙대는 운전자를 닦아세웠다.
집에 하나 있는 노트북을 제조한 회사 A/S센터가 마침 집 근처라 마누라더러 한참 자고 있을 큰딸한테 아비랑 수리 맡기러 가라고 전화하랬더니 마누라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보기 드물게 민첩한 반응에 놀랐던 걸까. 하여튼 그렇게 해서 큰딸과 화요일 오전 내내 노트북 들고 동분서주하기에 이르렀다.
SSD라는 부품을 교체해야 성능이 향상되는데 교체 비용이 20만 원에 육박한다는 A/S센터 직원 설명에 고민을 좀 했다. 아예 새로 사면 얼마나 하나 싶어 아래층 노트북 코너로 가봤더니 문서 작업만 할 가장 저렴한 노트북 가격조차 100만 원 수준이었다. 바로 맞은편 건물 전자기기 할인마트 매장도 들렀었는데 대동소이했다. 공부에 필요하다면 그게 뭐든 좋은 것, 새 것을 사주고 싶어하는 마누라 심정은 이해하지만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 공부를 먼저 해본 선험자로서 신형 노트북과 자격증 취득에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가급적 쓰고 있는 노트북을 재활용하는 편이 낫다는 입장이었다. 전적이 화려한 큰딸도 제 어미한테 면목이 없던 터라 아비의 뜻에 다행히 동조를 했고 그길로 가까운 PC수리 점방으로 향했다. A/S 센터 직원과 진단은 동일했으나 비용은 달랐다. 거의 절반 가격으로 성능을 업그레이드시켜 주겠다고 하길래 선뜻 카드를 긁었다.
큰 시름 던 후련한 기분으로 대형마트에 가서 딱 한 사람 먹을 양으로만 파는 유산슬과 팔보채, 그리고 캔맥주 2개를 사 집에서 점심을 겸해 큰딸과 낮술을 즐겼다. 그 자리에서 큰딸은 그간 물심양면으로 애를 쓴 제 어미한테 가질 수밖에 없는 미안한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공들인 시간이 햇수로만 세 해째 접어들지만 약학대학원 편입은 물거품이 됐고 자동차면허증도 따지 못했는데도 또다시 간호대학 편입을 준비하고 자격증에 도전한다며 공약을 날리는 몰염치를 모르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왜 새벽 3시까지 알바에 전력을 기울이는지에 대한 심경을 토로할 적에는 좀 놀랐다.
자라면서 자기가 무얼 잘하는지를 전혀 몰랐다고 했다. 주위 친구들을 보면 그 친구만의 유별난 기질이나 독특한 개성이 확 느껴지곤 했지만 자기한테는 과연 그런 게 있기나 한 건지 몰라 늘 주눅이 들었댔다. 그러다가 휘트니스 클럽 오후 데스크 담당 알바를 하는 중에 거길 드나드는 손님들, 그 전에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한테 친절하고 살갑게 응대를 하고 그들이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조성할 줄 아는 자기가 무척 낯설었지만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일할 맛이 나니까 능률이 올라가고 그런 자기를 대표를 포함해 주변 사람이 일 참 잘한다고 칭찬을 해줘 무척 고무되었다고도 했다. 문득 다른 사람과 관계를 원만하게 구축하고 유지할 줄 아는 능력이 자기가 몰랐던 자기만의 개성이나 기질임에 분명하다고 확신했고 마침내 유레카! 포텐이 터진 것이다. 알바 시간은 밤 11시면 끝나지만 폐점하는 새벽 2시까지 운동도 하면서 조카처럼 예뻐해 주는 여자 대표와 업무와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무엇보다 재밌다고 부연했다. 최근에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길 원한다는 오퍼를 받고 목하 고민중이라고도 전했다.
헌데도 휘트니스 클럽에 오래 일할 마음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올해 간호대학 편입에 도전해 그것마저 무산이 되면 어차피 내년에 복학을 해야 해서 길어봐야 올해까지만 유지할 알바 자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아비가 착각했던 점을 큰딸이 짚어줬다. 연초에 휴학한 대학교에서 날아온 통지문엔 올해까지 복학하지 않으면 무조건 제적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나 연속으로 두 번 휴학을 한 경우라는 전제가 깔린 내용이었다. 큰딸의 경우 한 번 휴학을 했으니 한 번 더 휴학할 여지가 남았던 거고 하여 큰딸은 통지문을 받자마자 휴학을 재신청했던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다 듣고 보니 영화 <기생충>에서 아비로 분한 송강호가 한 대사가 문득 떠올랐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자기만의 유니크한 개성이나 기질을 알아채는 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MBTI니 Holland(직업선호도) 검사가 인기인 까닭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좌충우돌한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차츰차츰 자기를 알아가는 큰딸의 노고는 인정하고도 남음이다. 바란다면 발견에서 그치지 말고 발전 ,확장시키는 노력을 더 기울여 '완전히 기능하는 사람(fully-functioning person)'으로서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시켰으면 한다. 내 딸이지만 참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