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할 때부터 단골인 라떼파파(lattepapa)와 유치원생인 그의 아들이 머릴 깎으러 왔다. 아들 커트가 마무리될 즈음 깎새한테 양해를 먼저 구한 다음 TV 채널을 바꾼 게 EBS 교육방송이었다. 마침 미취학아동이 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몰린 그야말로 프라임 시간대여서 혹시 아들이 기다리는 동안 칭얼거릴까 염려스러운 라떼파파의 센스있는 선제 조치였다. TV에선 영어를 활용한 상황극이 방영되는 중이었고 유치원생은 라떼파파의 예상대로 초집중해서 뚫어져라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귀에 익는데도 왠지 어색한 영어 회화가 들렸다.
- How are you?
- I'm good.
- How are you?
- Not bad.
중학교 입학했을 때 난생 처음 영어책이란 걸 받아들었다. 영어는 무조건 외워야 장땡이라면서 조자룡 헌 창 쓰듯 회초리를 휘두르며 토시 하나까지 다 외우게 강요한 중학교 영어 선생 덕에 손 뗀 지가 수십 년임에도 가악중에 외국인과 마주친다 한들 툭 치면 탁 하고 바로 튀어나올 영어 회화 한 가락쯤은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더 기막힌 건 운은 먼저 떼놓고선 상대방 반응을 예상한 대답까지 죄다 외워 버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 How are you?
- Fine. Thanks. And you?
- Fine.
난생 처음 영어란 걸 배웠을 때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EBS 방송에서 흘러나온 "How are you?"는 안부를 묻는다는 점은 똑같은데 돌아오는 대답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달라 혼란스러웠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시간과 장소 따위를 언어 의미 분석의 주요 요소로 삼는다는 화용론에 대해 과문한 어리보기 주제에 어쭙잖기 짝이 없지만, 수십 년 전 "How are you?"의 화답은 안부를 물어주는 상대방에 대한 감사와 내친 김에 그의 안부까지 되묻는 배려("Fine. Thanks. And you?")가 묻어나왔다. 헌데, EBS 영어가 대세 영어라고 한다면, 요즘은 묻는 말에 짤막한 반응만 내보인 채 대화가 성마르게 완결되는 분위기여서 아쉽다. 둘이서 대화라는 걸 하고 있지만 어째 야박하고 삭막한 기운이 감도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수십 년 전 영어책에 빼곡했던 회화 대부분이 실용영어와는 거리가 한참 먼, 우리말로 빗대면 일반인들이 거의 안 쓰는 고어투나 한문투에 가깝다는 평을 들은 기억이 언뜻 난다. 그럼에도 회화라는 게 상대방을 상정해 마주보고 얘기를 나눈다는 본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한 설령 그게 빈말이든 죽은말이든 보다 원만한 소통을 담보하기 위한 군말도 필요한 법이고 그게 수십 년 전에 "How are you?"에 화답하는 "And you?"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좀 아쉽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이 모두 파편화된 나노사회로 세상은 변모되고 언중들 간에 만들어진 사회적 약속이라는 언어의 사회성에 비춘다면 사람들이 쓰는 언어도 점점 그렇게 따라 변해갈 게 뻔하지만 말이 사람들한테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이제 겨우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한 아이들한테 별로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닌 걸 미리 알려주는 게 과연 바람직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How are you?"로 촉발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