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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프레임

by 김대일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 경기를 보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의 시동이 기차 선로 위에서 갑자기 멈춰 버렸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아버지는 시동을 걸려고 황급히 키를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기차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외과 의사가 챠트를 보더니 “난 이 응급 환자의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절규하는 것이 아닌가?(최인철, 『프레임』, 21세기북스, 2016, 32쪽 )​

이 대목을 처음 접했던 5년 전과 비교해 지금 다시 읽어서 의아쩍은 구석은 별로 없다. 외과의사라면 응당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프레임)에서 제법 자유로워졌다는 방증일 테다. 하긴 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만 해도 선혈이 낭자한 환자의 환부를 도려내는 여자 외과의사가 등장하지 않으면 시청률 제고를 걱정해야 할 만큼 세상은 변했다. 상전벽해란 표현이 그리 과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시절에 즈음하여 따라서 저자의 다음 언급은 이제 그만 용도폐기해도 될 법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버지는 아들과 사고를 당한 뒤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던가? 혹시 의사가 친아버지고, 야구장에 같이 간 아버지는 양아버지였을까?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 그 의사가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보라.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당신이 이 시나리오를 조금이라도 의아하게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외과의사 = 남자’라는 전통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 고정관념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그 의사가 엄마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외과 의사가 엄마라는 것을 짐작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응급수술을 담당하는 외과 의사로 거의 자동적으로 남자를 떠올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뿌리 깊게 형성돼 온 젠더 프레임의 희생양인 셈이다.(같은 책, 33쪽)

그렇다고 남자다움과 여자답지 않음의 고정관념에서 세상이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볼 수 없다. 당장 내 점방만 해도 윽박지르는 남편,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남편의 대중없는 지청구에 안절부절못하는 아내가 매달 어김없이 내 앞에서 가부장적 프레임을 시현하는 걸 보면 말이다. 참 이상도 하지. 남편이란 작자는 어딜 가나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 산책을 가든 시장을 가든 목적지가 어디가 됐든 부부가 한몸처럼 움직인다. 그 모습이 오붓한 부부상으로 비춰지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겠지만 꼭 종 부리는 양반으로 보이는 게 문제다. 점방에서 드러나는 행태는 가관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반려견모양 남편이 머리를 다 깎을 때까지 ​아내는 대기석에 앉아 꼼짝을 안 한다. 아주 가끔 주전부리로 갖다 놓은 커피 믹스를 꺼내 먹으려고 하면 남편이 언제 봤는지 머리를 깎다 말고 "니 뭐 먹노? 내가 손 대지 말랬제!" 버럭 소리를 지르면 기겁을 하고는 들고 있던 믹서를 놓아 버린다. 다 깎고 머리 감으러 남편이 세면장으로 향하면 쪼르르 달려가 수건 한 장을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는 남편 머리 감는 데 지장이 없게 세면장 수도꼭지를 붙잡는다. 그 모습이 다정한 부부애의 구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건 매번 그럴 적마다 자연스럽기는커녕 억지로 강요된 노역처럼 보여서고 깎새는 다른 데로 눈을 돌려 애써 외면한다. 남들은 모르는 부부 사이의 내밀한 속사정을 전혀 알 리 없는 제3자가 더 왈가왈부하는 건 대단히 몰지각한 짓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 앞에서 거리낌없이 드러내 보이는 마초이즘 역시 썩 지각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지껏 접했던 신문 칼럼 중에 내 맘대로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은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의 <이순신 장군의 자세>(한겨레신문, 2017.11.02.)가 내게 끼친 영향은 의외로 대단했다. 칼럼을 읽고부터 앉아서 오줌 누는 습관을 들인 나는 성 중립성을 실천에 옮기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 견고한 틀로 여전히 건재한 왜곡된 젠더 프레임(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데 미력하나마 할 게 뭔지를 늘 고민한다. 대체 뭔 내용이길래 호들갑인가 궁금하면 아래를 클릭하시라. 읽어 두면 유익할 테니.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70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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