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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90)

by 김대일

(<스며드는 것>이란 시에 적잖게 감흥이 일어 안도현이라는 글쟁이의 시만 들입다 검색했더니 흔전만전이다. 그 중 짧은 시만 추려 몇 수 옮길까 한다. 지난주에 이어 '안도현 특집'인 셈이다.

언어를 사유화해 난공불락의 상징 체계로 무장해 독자를 윽박지르는 현대시와는 사뭇 다른 친근함과 다정함이 그의 시엔 듬뿍 배어 있다. 게다가 쉬운 언어들로도 고결한 시 정신을 향유케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래서 그의 시는 무척 매력적이다.)

<무식한 놈>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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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는 것>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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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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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바람은 불지요,

길을 열자고 같이 나섰던 동무들은

얼음장 꺼지듯 가라앉아 소식 없지요,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언덕배기 빈 터에 쑥 돋듯 하지요,

저 연록 물오른 바람난 실버들 가지처럼

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요,

나도 내 존재를 어쩌지 못해서요,

아래서는 안돼, 안돼 하면서

내 몸은 자꾸 꼬여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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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시 쓰다가

날선 흰 종이에 손 벤 날

뒤져봐도

아까징끼 보이지 않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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