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국 야구의 몰락과 예능 선수

by 김대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아이스하키팀은 마지막 리허설로 2017 유로 하키 채널 원 컵에 출전한다. 동아시아 국가 최초로 탑 디비전(1부리그 격, 최상위 16개국)에 진출한 세계 랭킹 21위 한국 팀은 캐나다(세계 1위)와 2-4, 스웨덴(5위) 1-5, 핀란드(4위) 1-4로 3전 전패를 당하지만 세계 최강 팀들과 대등한 경기를 벌인다. 최강 팀들의 승수쌓기 제물이 아닌 그야말로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경기력은 향후 언더독의 반란을 기대하고도 남음이었으니 그들의 악전고투에 고무된 국내 한 일간지는 <3번 다 지고도 기분이 좋다>(한겨레신문, 2017.12.18.)란 기사 제목을 뽑아낼 정도였다. 이기는 법을 모르는 열패감에 의기소침할 만도 하지만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한 독한 수련을 마다하지 않는 팀이었기에 시합에서 지고도 올림픽이 더 기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패를 당한 건 똑같은데 최근 WBC대회에 참가한 한국 야구팀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2018년 한국 아이스하키팀과는 사뭇 다르게 인색하다. 베이징올림픽 이후로 한물간 한국 야구의 경기력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그보다 근본적으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미는 줄탁동시의 조화로움이 실종된 지 오래인 야구판에서 그저 가시적인 성과만을 좇다가 쪽박 차기 직전까지 몰린 부자의 파산을 목격하는 듯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류현진, 강정호, 김하성, 이정후로 이어지는 야구 천재가 꿈의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에 입성해 한국 야구의 저력을 어렵사리 잇는 게 과연 한국 야구의 본질일까. 정작 야구는 단체 경기인데 말이다. 특출난 선수 한 명이 받는 스포트라이트가 전체 야구단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면 정말 중요한 건 탄탄한 저변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나는 은퇴식 때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TV 예능을 기웃거리는 야구 은퇴 선수들, 이른바 '예능 선수'들의 행태가 아쉽고 한국 야구의 몰락과 그들이 자꾸 겹치는 게 참으로 착잡하다. 작년 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들은 왜 '예능 선수'가 되었나> (2022.04.02.)​

왕년에 이름을 날린, 지금은 다들 은퇴한 야구, 축구, 농구 스타 4명이서 외딴섬에 들어가 밥 해먹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다른 채널을 돌렸더니 이전 채널에서 소라 까먹던 야구 스타가 역시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프로야구 선수 둘이랑 그가 운영한다는 햄버거 가게 테이블에 둘러 앉아 뭐가 그리 재밌는지 파안대소하며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아닌가. 또 어떤 종편 예능은 인기, 비인기 안 가리고 대한민국 스포츠에서 내로라했었고 은퇴한 뒤로도 여전히 그 영향력이 건재한 스타들을 한데 모아다가 아예 축구팀 하나를 만들어서 전국을 돌며 도장깨기식 시합을 벌이는 포맷으로 인기를 끄는가 보더라. 요새 방송 트랜드는 은퇴한 스포츠 스타를 모시지 않으면 프로그램 흥행을 담보하기 어려운 게 분명해 보인다.

선수 시절 스타로 등극하면서 자연스레 획득한 부귀공명은 엉뚱한 뻘짓 안 하고 처신만 올바르면 은퇴 이후에도 주욱 이어지는 게 통상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TV를 전세라도 낸 양 뻔질나게 등장하는 스포츠 스타들의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면상과 여유만만한 행동거지가 그걸 증명하는 게 아니고 뭘까. 세간의 이목을 끄는 대회 우승이나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은퇴 이후에도 우국봉공하겠다는 지극히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은퇴사가 고릿적 얘기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개인적 취향을 더 존중받는 최근 세태에서는 '나라 국國'자만 들어가도 시대를 역행하는 구태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이쯤에서 한때 몸 담은 종목에서 일가를 이룬 자기의 기량을, 꼭 국가를 위한 봉사 차원이 아니라, 그 스타를 동경하는 어린 꿈나무들에게 전수하려는 순수한 소명의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가 나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사람은 자기를 성공의 모델로 삼고 따르려는 타인을 가르치면서 강한 성취감을 느끼고 그걸 원동력 삼아 보다 건전하고 윤택한 삶에 이르는 긍정적 효과 말이다.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 나디아 블랑제와 아스트로 피아졸라를 예로 든다면 너무 고리타분한 발상인가.

하지만 나의 이런 기대 섞인 궁금증은 한 일간지 문화스포츠 담당 기자가 쓴 칼럼을 읽고 나서 얼마나 순진하고 무망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예능 선수'들에게 더 중요한 건 지도자로서의 소신이나 명예이기보다는 도깨비방망이처럼 휘두르기만 하면 뚝딱하고 부귀공명을 얻을 예능감과 신기루 같은 대중의 인기였다. 일반인은 모르는 스포츠 스타만의 애환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한때는 세인의 지대한 관심과 귀감의 대상이었던 이들의 예능 투신이 실은 팍팍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수단인 듯해 씁쓸하다.

최근의 스포츠 예능 붐에 편승한 이들의 경우는 좀 달라 보인다. 은퇴 직후 방송에 활발하게 출연 중인 스포츠 스타 A에게 지도자 데뷔 의향을 묻자 "시켜줘도 안 하겠다"는 냉소적인 답이 돌아왔다. 안타를 치고 나간 선수의 장갑을 받아주고 배팅볼을 던져주는 궂은 일은 감수할 수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립지만 그들도 선수 때 누렸으니까. 박봉의 코치직에 미련이 없다는 거다. 슈퍼스타는 아니더라도 현역 시절 억대 이상의 연봉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느끼는 박탈감과 경제적 타격은 크다. 코치 때부턴 무늬만 프로일 뿐 성과를 내도 연봉이 크게 오르지 않는다. 공무원처럼 매년 일률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언제 무슨 이유로 경질돼도 할 말 없는 고용 불안까지 코치직은 소신이나 열정을 펼치기보단 '연명'에 급급하게 만든다. 그래도 그 자리에 연연했던 건 돈보다 일자리 자체였다. 수요는 적은데 공급이 넘쳐나는 구조가 코치의 열악한 처우를 방치했다.

종목마다 차이는 있지만 프로스포츠 코치의 평균 초봉은 5,000만 원 정도다. A는 단 한 달 동안 각종 예능 출연으로만 그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귀띔했다. 영원한 갑일 줄 알았던 구단들의 코치 구인난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36.5℃-그들은 왜 '예능 선수'가 되었나>, 한국일보, 2022.03.31.)

져서라도 이기고 싶어했던 2018년 한국 아이스하키팀은 질수록 독해졌고 빛났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경기력은 스켈레톤의 윤성빈 금메달만큼이나 쾌거였다. 비인기종목으로 천대받던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헌신했고 우리는 그들의 무엇을 봤길래 그토록 열광했던가.

공인이기 이전에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혹은 부귀와 공명심을 쌓아 한 번뿐인 인생을 요란뻑적지근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자연인으로서 '예능 선수'의 의사는 존중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TV 예능 프로 한 편에 들이는 시간의 몇분지 일만이라도 떼어내 스포츠 스타를 동경해 그를 닮고 싶지만 돈 없고 빽이 없어 기량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는 후진 양성에 지속적인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동종업계의 열악한 환경이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그들이 보유한 사회적 영향력을 동원하는 센스를 발휘한다면 망조 들린 한국 야구에 회생의 빛이 돌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내 아주 사소한 의견이다.

작가의 이전글이면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