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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의 숙제

by 김대일

막내딸이 펜싱 특기생으로 들어간 고등학교는 조형예술 관련 특성화학교다. 미술이나 공예에는 영 젬병인 막내딸로서는 펜싱 외에는 학교 분위기에 스며들기란 쉽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었다. 점심 먹기 전 오전 일과는 교실에서 여느 학생과 다름없이 소화하지만 이후로는 줄곧 체육관에서 보내야 해서 교우관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학교 생활을 영위하는 데 애를 먹을 건 각오하면서도 서먹서먹한 기조가 3년 내내 이어지는 것만은 막내딸도 아비도 원치 않았다.

담임 선생님과 가진 짧은 첫 상담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었나 보다. 가뜩이나 미술 관련 과목을 담당하는 담임은 미술에는 젬병인 '펜싱만 할 줄 아는' 신입생을 사무적으로 혹은 같은 길을 안 가는 별다른 열외자로 등한시했을 수 있다.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건 아니다. 교과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을 붙잡고 여느 학생들과 똑같이 대하는 건 오랜 교직생활을 경험한 베테랑으로서 효율적이지 못하거니와 차라리 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기본적인 것만 빼고 방임으로 일관하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판단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걸리는 게 있다면 막내딸은 학교 생활을 행복하게 누리고 싶다는 점이다.

일요일 저녁 귀가를 하자 막내딸이 쪼르르 달려와 부탁을 했다. 담임선생님이 낸 숙제를 다음날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도와달라고. 학기 초인데다 신입생들이다 보니 자기 반 학생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었는지 <나에 대해서>라는 일종의 자기소개서를 써오라는 숙제였다. 숙제의 정체를 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말로는 미처 못한 이야기를 글로 대신하는 작업은 매력적이다. 상사하는 이에게 애틋한 정을 전하는 손편지의 위력은 의외로 대단해서 그걸 받은 이는 손수 들인 정성에 감복하고 절절한 내용에 또 한 번 감복한다. 갸륵한 진심이 탑재만 된다면. 마음 여려 속엣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소심한 막내딸이 자기의 심경을 일목요연하게 써내려간 글은 자기를 드러내는 데 무척 효과적일 게다. 하여 행복한 학교 생활을 누리고 싶은 것에 진심인 막내딸의 바람이 담임 선생님한테 진솔하게 전해질 수만 있다면 지금의 불편함이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한 게 맞다.

막내딸이 직접 쓰되 글을 구성하는 아우트라인은 아비가 조언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1) 가족사항을 알리되 가족들에게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기의 성격이나 기질도 함께 밝힌다.

2) 자기가 좋아하고 이루고 싶은 것.

3) 펜싱에 대한 생각. 주의할 건 뜬구름 잡는 식이 아니고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기.

4) 행복한 학교 생활 누리기 위한 자기의 노력과 바라는 점.

펜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이 치우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펜싱에만 매몰된 학교 생활은 반쪽짜리 어리석은 짓일 뿐이라고 당부한다. 교과에 집중하는 오전 수업만이라도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시간이라고 여긴다면 소중하게 다가올 거라고 했다. 그러다 열의가 생긴 과목이 있다면 그 과목 선생님에게 좀 더 다가갈 방법을 문의하는 건 지혜로운 발상이라고도 했다. 영어 회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영어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 있고, 시를 좋아하는데 자기 수준에 맞는 시인이나 시집을 추천해달라고 국어 선생님에게 요청을 할 수도 있다. 대학 진학에 올인하는 인문계와는 달리 학생이 그런 걸 물어오면 진지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정서적 여유가 특성화고 과목 선생님들한테는 다분하다고 짐작되어서다. 오전에 한해서지만 그런 식으로 반 생활에 열중한다면 반 동기들이나 담임선생님이 바라보는 시각도 차츰 달라질 테고 그렇게 차츰차츰 교류를 넓혀 나가다 보면 바라는 대로 행복한 학교생활을 누릴 게 아니겠냐는 아비의 청사진을 막내딸은 제법 경청하는 눈치였다. 그걸 밑천 삼아 열심히 끼적대더니 공책 2쪽 분량의 숙제를 완성했다.

두고 볼 일이다. 진심을 담은 손편지 같은 막내딸의 자기 소개서를 읽고 난 담임선생님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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