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장마처럼 내리던 그제, 점방 뒷마당을 통해야 화장실을 가고 빨래대도 내놓는데 하수구로 물이 안 빠지고 고이는 바람에 물 천지였다. 몇 달 전에도 이런 장면이 포착되었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도 천천히 다 빠져서 이번에도 지켜만 봤는데 빠지기는커녕 오전 내내 내린 비로 더 불어 까딱하다간 점방으로 넘칠 기세였다.
옆 점방 국수집 이모가 뒷문을 통해 호출했다. 먼 데로 출타 중이라는 건물 주인 아주머니(주인 부부는 건물 2층에 산다)와 통화한 걸 녹음했다며 들려주던데 그 하수구는 국수집과 내 점방 전용이니 둘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내용인 성싶었다. 세 든 지 7년째라는 국수집 이모는 그간 주인 아주머니한테 섭섭한 게 많이 쌓였는지 이번 일 말고도 갑질하는 주인 아주머니 행상머리를 성토하면서 겉은 인자한 척 하지만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돈 귀신이라는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똑같은 레퍼토리 한두 번 듣는 게 아니어서 지긋지긋한데다 고인 물을 한시라도 빨리 빠지게 하는 게 급선무인지라 한정없을 국수집 이모 넋두리를 일단 막은 뒤 방법을 모색했다. 잘 아는 기술자를 불러 수고비만 주고 작업을 시키자는 이모 말에 푼돈 장사하는 처지에 수고비까지 줘가면서 일을 맡기는 건 거시기하니 우리 선에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뒤 정 안 되겠으면 그때 가서 일꾼을 부를지 말지 결정하자고 제의를 했고 국수집 이모도 동의를 했다. 믿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부친 가게 일하는 김 군을 불렀다. 재주꾼인 김 군이 나서면 신통한 묘수가 생길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고 그런 내 기대에 부응하듯 김 군은 물 고인 하수구에 호스를 집어넣고는 물을 분사해 수압으로 혹시 막혀 있을 부분을 뚫어 보려고 애를 썼다. 허나 고인 물은 빠지지 않고 몇 번을 더 시도한 김 군은 두 손을 들고 사람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 건물 하자임에도 세입자들한테 책임을 전가하려는 주인 아주머니의 처사는 어처구니가 없지만 뒷마당으로 하수를 배출하기로는 노상 음식물쓰레기가 한 짐인 국수집 이모와 하루에 한 번 세탁기로 타월을 빤 세탁물이 전부인 내가 도매금으로 취급받는 게 너무 억울했다. 화장실 갖다 올 적마다 양말이 젖어 매번 갈아신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 억울하다고 미적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오후로 넘어가면서 비가 그쳤다. 뒷마당 고인 물은 여전히 철철 넘쳐흘렀고 온다는 기술자는 먼저 잡힌 일을 마무리를 지어야 운신할 수 있으니 시간이 걸리겠다는 전언이었다. 그러던 차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백발 노인이 뒷마당 창고를 어슬렁거리더니 쇠꼬챙이 같은 걸 꺼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건물 앞, 그러니까 내 점방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땅바닥에는 지나가던 행인이 밟으면 찰카당 쇠 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오수받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쇠뚜껑이 있다. 그 뚜껑을 열고서 뒷마당 창고에서 가져온 쇠꼬챙이로 이리저리 쑤시는 게 아닌가. 앉아서 쑤시다가 여의치 않았는지 숫제 배를 깔고 엎드리고서는 손을 쑥 집어넣기까지 했다. 막힌 곳을 긁어내는 동작인 성싶은데 몇 번 그러고 나니까 오수가 콸콸콸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뒷마당 고인 물이 순식간에 다 빠져서 언제 물이 찼냐는 듯 뒷마당이 말끔해졌다.
주인 아주머니만 상대한 나는 그 노인이 주인집 바깥 어르신인 줄 그날 처음 알았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직감한 주인 아주머니가 바깥 양반을 급히 출동시켰던 게 틀림없다. 하기사 아무리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다 놓아도 건물 주인보다 구조를 잘 알 리 없으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주인 아주머니 대처는 옳았다. 이럴 거면서 전화기에다 대고 섭섭한 소리만 골라서 할 건 뭔 심보인지 원. 국수집 이모한테 주인 아저씨가 당부하는 소리를 엿들었더니 찌든 기름때나 음식 찌꺼기 따위가 안 흘러가고 쌓이면 하수구가 막히곤 하니 유념하라는 거였다. 국수집 이모를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로 지목한 셈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할 국수집 이모다. 그러니 주인 아주머니나 국수집 이모나 도긴개긴인 셈이다.
그건 그렇고 올 장마가 걱정이다. 봄비에 이 지경이면 장마철엔 어찌 감당할꼬. 작년이 마른 장마였다고 올해 또 그러라는 법이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슬슬 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