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마치 내 가슴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 같구나. 한 마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인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손자가 물었다.
"어떤 늑대가 할아버지의 가슴속에서 이기게 될까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이발학원 동기인 남자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점방을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작년 이맘때 두루마기 휴지롤을 개업 선물로 두고 간 뒤 감감무소식이더니 안부 묻는답시고 연락이 왔다. 지금 하는 일을 아예 청산하고 하루라도 빨리 커트점을 열고 싶지만 미진한 그 무엇 때문에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혼자 즐겁다고 밀고 갈 사안이 아니고 가족들의 생계와 직결된 거라서 지금 하는 업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도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를 가족들에게 충분히 납득시켜야 하지만 역시 미진한 그 무엇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의 판단력에 도움을 줄 만한 그 무엇도 제시할 수 없어 이어지는 통화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그간 쌓인 묵은 생각까지 몽땅 쏟아붓는 말폭탄을 터뜨려 놓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떠드는 버릇은 전혀 정이 안 갔다.
남자는 영도인가 다대포인가 그 어디메쯤 소재한 대형 사우나 안 마사지실을 아내와 같이 운영한다. 사우나 안 이발소 주인이 늙어서도 해먹을 수 있는 게 이발 기술이라는 꼬드김에 홀딱 넘어간 그는 이용학원 자격증 대비반에 들어갔고 그때 처음 나와 조우했다. 아마 2020년 가을께였을 게다. 가발 머리에다 대고 가위질하던 어느날 학원 다른 켠에서 무료 이발을 해주는 실무반을 가리키면서 왜 자기한테는 사람 머리 깎는 법은 안 가르쳐 주냐고 원장한테 대들어서 단계를 밟아야 실력이 는다는 설명에도 아랑곳없이 고집을 부리는 통에 마지못해 실무 기술까지 병행한 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도 시원찮은데 서둘러서 이룰 기술이면 달려드는 족족 다 프로가 됐겠다며 늙은 원장은 빈정댔다. 아니나다를까 자격증 대비반, 실무반 그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해 어색하고 서투른데다 천성인지는 몰라도 하는 일마다 설렁설렁 여물지 못하고 무성의한 태도가 늘 도마에 올랐는데 그 습벽 때문인지 기량이 진일보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늙은 원장이 팔고 나간 자리에 야심만만한 젊은 원장이 꿰차고부터 학원을 일신하자 남자는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고 몇 달 뒤 그 이듬해 첫 번째 이용사 실기 시험 결과가 나온 직후 그는 학원을 다시 찾았다. 자격 시험은 합격률 높다는 다른 학원에서 대비해 치뤘고 실무 기술은 사람 머리로 커트할 기회가 많은 이 학원이 유리할 성싶어 다시 찾았다고 무덤덤하게 재등장의 목적을 밝혔다. 잇속을 채우기 위한 최단, 최적의 수단을 물색하는 데 반지빠른 게 능력이라면 능력이니 왈가왈부할 바는 아니건만 사람 많은 싸전에서 쌀 집어 먹는 병아리마냥 약아빠진 처신이 얄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댔다고 남자는 이용사 실기 시험을 한 번만에 덜컥 합격했다. 그에 비해 거푸 고배를 마신 나는 치졸한 열패감에 빠져 한동안 아는 척도 안 했다. 다음을 기약하기가 두려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재도전을 준비해야 하는 참담함이 옹졸함보다 더한 까닭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날 남자가 슬며시 다가와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따.
"학원 그만둘까 합니다. 젊은 원장 기술 좋은 건 알겠는데 나하고는 영 안 맞아요."
무슨 바람이 불어 또 변덕인가 싶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젊은 원장은 주로 가위를 활용해 고급지며 세련된 기술로 고단가를 추구하는 커트 기술에 천착하는 교육이었다. 그런 원장을 우러르는 학원생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저렴한 가격에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통상적인 남성 커트를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무엇보다도 원장의 고난도 기술에 근접하려면 그만큼의 재화와 공력을 들여야 하는데 내일이라도 당장 현장에 투신해 지지고 볶아도 시원찮을 생계형 원생들한테는 부질없는 짓이나 다름없어서였다. 그는 박제된 기술보다는 역동적인 현장성에 목을 멨다. 현장에서 부대끼며 실전 감각을 체득함으로써 자기의 기술적 핸디캡을 상쇄하려는 의도는 영리한 발상이었다. 아버지를 소개해줬었다. 일회성 만남을 전제로 했지만 60년 경력을 자랑하는 장인에게 깊은 영감을 얻었는지 남자는 이후로 문지방 닳듯 뻔질나게 부친 가게를 찾았다. 늦은 나이인데다 기술까지 얼떠 다른 점방 시다 자리 소개 시켜주기가 면구스러울 정도라는 냉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은근히 살뜰하게 챙기는 눈치였다. 남자가 고백한 속사정에 부친 마음이 흔들렸던 까닭이었으리라.
떼돈은 못 벌었을지언정 마사지로 먹고살 만은 했다. 하지만 역병이 돈 이후로는 상황이 급변했다. 사우나하러 안 오는데 마사지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문득 상황이 풀리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면서 알량한 마사지 기술만 믿다간 밥 빌어먹기가 어렵겠다는 위기감이 들던 차에 이웃 이발소 사장 귀띔에 솔깃했단다. 장밋빛 미래를 담보할 험난한 현실을 간과했다는 게 문제라면 큰 문제였지만. 한 마디로 너무 쉽게 봤다는 거다. 자격 시험은 한 번만에 요행히 넘어갔지만 자격증과 실무는 엄연히 달라서 학원에 더 목을 매었건만 다닐수록 갑갑증은 더했다. 부친 점방을 드나들면서 현장을 체감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실전에는 턱없이 모자란 자기 능력을 깨닫고 절망했단다. 허접한 시다 자리조차 어울리지 않는다는 부친의 냉정한 평가가 자기를 각성시키면서도 한편으로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라고. 언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하고 말이다. 당시 부친의 말씀을 듣고는 더 이상 그를 백안시할 수 없었다. 그의 모습에서 내 자화상을 발견해서인지 모르겠다.
예약제로 돌린 마사지 일을 빼면 잘 깎고 빨리 깎는 요령을 익히러 백방으로 뛰어다닌다는 후문이다. 성미 급한 그가 여지껏 개업을 미루고 있는 게 뜻밖이지만 그만큼 신중을 기한다는 의미니 긍정적이라고 나는 본다. 다만 솜씨에 대한 열의에 비해 그 이치에 다가서는 진지함은 다소 결여된 그의 행보가 그의 미래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