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혹은 남은 일곱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그게 관건이야.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하지.
한때 아들러 심리학 신드롬을 일으켰던 기시미 이치로의 저서 『미움받을 용기』에서 뽑은 한 대목이다. 유대교 교리까지 끌어와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요지는 무엇일까. 나를(내가) 싫어하는 사람 맞은편에 나를(내가) 죽어라 좋아하는 사람이 배나 많은데도 한쪽(혐오)에만 몰두하다 가뜩이나 난맥상 같은 인생 더 꼬이기 십상이니 미운 사람은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살살 달래고 차라리 우호적인 사람과 더 돈독해지도록 애를 쓰는 영악한 이중 플레이가 더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교리나 경전에 등장하는 숫자가 구체성을 담기보다는 은유나 함축의 의미가 더 짙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용한 교리에 등장하는 숫자놀음이 영 내키지 않는다.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 반면 좋아하는 사람은 왜 두 사람일까. 혐오보다 우호적 관계망이 더 광범위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그 반대의 경우가 없지 말란 법 없다. 만약 그런 곤혹스러움에 처한 사람더러 균형감을 유지하라고 팔자 늘어지게 떠든다면 그런가부다 닁큼 받아들일까?
게다가 나한테 이도저도 아닌 나머지 일곱 사람은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들일까. 호오의 경계 밖에서 나와 무관한 채로 그들만의 리그에만 몰두하는 무감각한 쇼윈도 마네킹 같은 타인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는 거다. 일곱 명 전부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무리라면 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꼬셔서 나와 선린 관계를 맺어 판도를 바꾸는 건 어떨까. 교리에 나온 대로 미운 사람과 좋은 사람의 비율이 1 : 2에서 보다 더 유리한 환경(1 : 3)으로 바뀜으로써 대인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가 한결 줄어들 공산이 크지 않을까. 설령 내 편 끌어들이기 시도가 불발해 1 : 2 구도가 2 : 2로 어그러진다 해도 기시미 이치로의 표현을 빌자면 '인생의 조화'를 이룬 셈이니 손해볼 건 없다. 하여 나를(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내 편으로 바꿀 용기는 안 나고 나를(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현상유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지면 이도저도 아니라고 방치해 둔 일곱 사람을 일껏 공략하는 게 이롭겠다는 셈에 열중하련다.
보험설계사가 새로 출시한 상품을 안내한다면서서 팸플릿을 두고 갔다. 하는 짓이 노회했다. 문득 보험설계사보다 노련한 인간관계론의 달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불끈 솟았다. 지상 목표인 매달 커트 손님 600명을 유치하려면 내 편 네 편 나눌 처지가 아니다. 방관하는 7명에게 주목하는 게 매상 올리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