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by 김대일

근래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해 내질 못한다. 이름 떠올리려고 끙끙 앓다가 하던 일마저 까먹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원래부터 외우는 데는 젬병이었지만 요즘 특히 사람 이름만 골라서 지우는 지우개가 머릿속을 횡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다랍다. 기억력 감퇴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아직 팔팔하고 창창할 나이(만 49세)에 속수무책인 게 당황스럽고도 속상하다.

한번은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일일이 들춰봤다. 이름은 낯이 익는데 얼굴이 안 떠오르거나, 이름 생경하니 얼굴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불명한 연락처가 수두룩했다. 교분을 맺었으니 다음을 기약하려 연락처까지 나눴겠지만 격조한 사이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화석같은 흔적(전화번호)만 남았을 뿐이다. 분명 예사롭지 않았을 인연이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마저 잊어버린 건 노화를 빙자한 기억력의 감퇴가 아니라 혹시 쌓아둘 줄만 알았지 그 관계를 계속 잇고 다질 줄 모르는 내 무능과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 아닐는지.


건망증에는 3단계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전화벨이 울린 다음의 대사다.

1단계 : 여보세요. 거기 성말구 선생 계십니까. 본인이신가요? 예, 그런데 내가 뭐 때문에 전화를 했더라? 혹시 아시겠습니까?

2단계 : 여보세요. 저는 성억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거기 전화 받는 분이 누구신가요? 제가 누구한테 전화를 했는지 헷갈려서…

3단계 : 여보세요. 저 성말구 선생 계신가요. 예, 저요? 저는, 저는, 저는…(소리가 멀어지며) 여보! 내 이름이 뭐였지? (성석제, 「즐겁게 춤을 추다가」, 강)


웃기는 대목인데 웃을 수가 없다. 이러다가 '진정 내가 알고 있던 나라는 나의 나는 누구며 무엇'이냐고 나한테 물을지도 모를 일이라서.


잊지 않으려 여기에 남긴다. 27-15열, 내 친구 L이 잠든 묫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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