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가 끝난 노인이 가져온 종이봉투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책이었다. 고故 이어령 교수가 썼다는 추천사가 첫머리를 장식한 『노인과 바다』 소설책이었다. 어린이 전용 서적 출간으로 유명한 출판사에서 양장판으로 낸 세계 문학 전집 중 한 권이었다. 보통 책보다 글자 크기가 곱절은 커 특히 노인들이 오래 읽어도 눈에 부담이 덜 가게 잘 배려한 티가 났다. 어린이나 노인을 위해 가공되었다면 원작에 집착하는 독자의 구미를 당기기에는 한계가 분명해 보이긴 했다.
노인이 그간 점방 한 켠 선반 위에 널부러진 책들을 보면서 '독서하는 깎새'에게 진한 동료애를 느낀다는 걸 눈치챘다. 책은 얼마나 보느냐, 사서 읽으면 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차라리 도서관에 가서 빌려 보는 건 어떠냐 따위를 물으며 관심의 수위를 높이더니 급기야 자기가 통독한 소설책을 빌려 주는 데 이르렀다. 그러면서 톨스토이의 『부활』(역시 같은 출판사의 전집 중 한 권)을 읽고 있는 중인데 그것도 다음번 점방 들를 때 빌려 주겠노라 내 의향은 전혀 고려치 않고 선언해 버렸다. 따라서 『노인과 바다』는 노인이 다음번 머리 깎으러 오기 전까지 다 읽어야 하는, 노인이 다달이 머리를 깎으니까 한 달이라는 말미가 자연스럽게 정해진 셈이다.
다 좋은데 노인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취미지 생색내기가 아니다. 책을 수면제 대용으로 여기는 사람 앞에서 독서가 인간에게 끼치는 이로움을 역설하는 건 끽연가가 흡연이 제공하는 정신적 이완 효과를 늘어놓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돼먹잖은 우월감으로 구별짓기 따위는 꼴사나운 짓이다. 하지만 선반에 책이 즐비해 독서가연하는 깎새가 자기의 측근이라도 되는 양 노인은 세상의 양식糧食이란 책에서 얻는 양식良識밖에 없다는 식의 독서지상주의를 게거품을 물어가며 힘주어 떠드는 장면에서는 욕지기가 솟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내 독서 취향은 이렇다. 나는 외국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우리말 문해력도 달리는 판국에 번역본 읽기란 너무 버거워서 극히 꺼린다. 대신 우리나라 작가가 쓴 우리나라 소설을 주로 찾아 읽는다. 말귀를 알아먹는 우리나라 사람이 써서 행간의 의미를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문장의 표현력을 기르자면 우리나라 소설만 한 게 없어서다. 덧붙여 나는 누가 읽어 보라고 추천하거나 빌려주는 책은 잘 안 보는 청개구리 기질을 숨기지 못하겠다. 그리 안 해도 읽을 만한 게 지천에 깔려 있기도 하거니와 내가 직접 발굴한 책을 읽는 재미가 남이 권하는 것보다 훨씬 쏠쏠한 걸 어쩌랴. 하여 노인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받긴 받았지만 돌려줄 때까지 읽을는지는 미지수다. 한참 헤밍웨이에 빠졌을 때 이미 읽었던 소설이기도 하고.
독서는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한정지어도 충분하다. 책에 빠져 사는 나를 정 뻐기고 싶으면 글을 쓰시라. 그동안 읽었던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들만 뽑아뒀다가 글짓는 사이사이 그것들로 도배질하면 독서를 통해 고양된 당신의 교양이 자연스럽게 과시될 테니까 말이다. 굳이 사람들 면전에다 대고 자기가 독서광이라고 자랑질하는 건 암만 좋게 봐주려 해도 꼴값 떠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