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결의 대상

by 김대일

남한테 싫은 소리를 잘 못해 주로 속으로 삭이는 편이지만 가끔 아주 심기가 불편해지면 기어이 해소를 해야 그날 밤 숙면에 드는 고약한 심보도 마음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이 나다. 커트 요금 5천 원에 걸맞은 머리면 누가 뭐라 하랴. 머리는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깎으면서 봉두난발을 해가지고 자주빛으로 물을 들인 머리결은 싸리비마냥 거칠기 이를 데 없는데 짧은 상고머리로 깎아 달라고 주문하면 올 적마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계절 바뀔 때만 들른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잊지 않고 찾아 주니 단골은 단골인데(작년 3월에 개업한 뒤로 춘하추동춘, 기껏 다섯 번 온 게 다인 사람이 단골이면 매달 들르는 손님은 억울해서 통곡할 노릇이다) 미운 건 어쩔 수가 없다.

파나소닉 ER1511 바리캉이 내 주무기다. 가격은 15~16만 원 선인데 날만 따로 구입하면 4~5만 원 한다. 점방에 바리캉 3개를 비치해 두고 번갈아 쓰고 있지만 기계다 보니 마모가 없을 수 없다. 특히 안 감아 기름 번들거리고 떡진 머리, 철사를 연상시키는 빳빳한 직모, 그 직모가 곱슬에 푸석푸석하기까지 한 머리를 아득바득 깎다 보면 바리캉 날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난다. 그런 불한당 같은 머리털에 자꾸 치이다 보면 제 명은커녕 금세 고물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커트점 오기 전 예의바르게 머리를 감는다든지 바리캉 날이 스치기만 해도 스윽 잘리는 커트에 최적화된 찰랑찰랑한 머리결을 가진 손님만 기대하는 건 장사를 안 하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하여 점방 기틀이 잡히기까지 아직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바리캉 날이 성할 날이 없어서 깎새의 심기를 정기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손님은 차츰차츰 척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건 깎새가 장사를 오래 해먹기 위한 필수적인 과업이다. 마침 어떻게 하면 상대 기분 안 상하는 세련미로 척결할지 그 방식을 고민하던 차에 그 첫 희생양으로 삼은 이가 머리를 안 감은 봉두난발에 컬러 염색물을 들인 직모에 곱슬이면서 푸석푸석하기까지 한데도 커트는 계절 바뀔 때만 하는 바로 그 미운 손님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할 말은 하겠다는 신념으로 의미심장해진 표정을 부러 지으면서 깎새가,

"머리숱은 엄청난데 머리결까지 거칠면 참 곤란합니다."

"…"

"선생님,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바리캉 날이 하나에 4~5만 원 합니다. 5천 원 커트값 받아서 바리캉 날만 사다 보면 남는 게 없습니다."

"…"

"선생님 머리처럼 숱 많고 푸석푸석한 머리에 남아나는 바리캉 날은 없습니다. 선생님도 들리시죠? 날 안 나가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

"다음번에 오시면 추가요금을 더 받을까 합니다. 서운하다 여기지 마시고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다음번에는 안 보기로 하자. 여기 말고 딴 데 가서도 좋은 소리 못 듣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악연은 오늘로 이만 끝내기로 하자.')

"그래요."

추가요금을 내고서라도 깎겠다고 점방 문 열고 들어오면 나가라고는 못 하겠지만 '더러워서 다시는 여길 오나 봐라'며 제발 두 번 다시 걸음 안 하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다.

작가의 이전글시 읽는 일요일(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