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탄 사람의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추상화에 가깝지만, 걷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세밀화와 같다. 나뭇잎의 색깔과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가 모조리 다 기억난다.(김중혁 소설가)
똑같은 풍경인데도 점·선·면으로 단순화되기도,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담아낸 세밀화로도 보이는 까닭은 '속도' 때문이다. 그 속도로 인해 혹시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신영복, 『강의』, 돌베개, 128~129쪽)
만화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고故 타나구치 지로와 구스미 마사유키 콤비가 공동작업한 또다른 만화 『우연한 산보』는 천천히 걸으면서 일상의 따뜻한 풍경을 담아 내는 미덕을 가졌다. 작품의 원작자 구스미 마사유키는 스토리 취재를 위해 실제 도쿄 여러 곳을 걸어봤다고 한다. 원작 뒷이야기를 통해 밝힌 취재의 규칙이 특이했다. 첫째, 조사하지 않는다. '관광 가이드'나 '동네 산책 매뉴얼' 따위, 책이나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고 나가지 않는다. 둘째, 옆길로 샌다. 사전에 지도를 보고 간다고 해도 걷기 시작하면 그때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적극적으로 샛길로 샌다. 셋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시간 제한을 두지 않고, 그날 안에 정하려고 하지 말고 느긋하게 걷는다. 작가가 만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을 주는 산책이다.
주어진 일을 해치우듯 헐레벌떡 다녀오는 휴일 산책이 어쩐지 무미건조하고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정해 놓은 목적지에 자취를 찍고 왔다는 성취감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지향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어느 봄날 아침을 즐기는 기쁨만 할까. 어쩌면 내 일상 자체가 그 놈의 '속도'에 매몰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