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정호승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사랑이라면 할 말이 많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사랑의 불가분성은 집착일 뿐이다. 그 집착이 트라우마를 낳아 스스로를 옭아맨다. 그러니 사랑한다면(사랑했다면) 떠날 줄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신간이 편하다.
악몽을 글감으로 해 글로 남긴 적이 있었다. 애타게 찾아 헤매던 사람을 막상 만났더니 샐쭉거리고는 휙 뒤돌아 도망가 버려 가위눌리는 악몽을 자주 꾸었었다. 그 사람은 얄궂게도 첫사랑 여자였다. 무대가 꿈으로 바뀌었을 뿐 삼십 년 전 일방적으로 절교를 당한 과거사가 어쩜 그리 똑같이 재현되는지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런 꿈을 사흘들이로 꾸다 보니 혹시 내 머리가 이상해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가도 차마 버리지 못한 미련이 혹시 꿈을 빌어 소환된 거라면 아직도 빌어먹을 연정이란 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감정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가소로웠다. 미련이 남은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말랑말랑한 첫사랑의 여운이 설령 남아있다손 그걸 쫓는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짓인지 정도쯤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그보다는 미련이라는 것도 쌍방향이어야 로맨스가 되든 불륜이 되든 미련다워지는 것이지 일방적이면 스토커나 저지르는 추태나 다름없어 구저분하기 짝이 없다.
심리학적 현상 중에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는 만약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현실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는 행위다. 만약 그 여자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짓이 그 예가 되겠다. 반사실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집착에서 비롯된 후회를 동반한다. 그때 그렇게 하지(혹은 되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좌절이나 불안감으로 변해 사람 속을 내내 긁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실수로부터 더 나은 의사결정을 배우는 출발점이라는 이점이 없지는 않지만 심지 약해빠진 나같은 인간은 두고두고 가위눌림이나 당하는 신세를 못 면한다. 그렇다면 내가 꾸는 악몽은 집착에서 비롯된 미망인 것일까. 하긴 다시 못 올 첫사랑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아둔한 짓임에는 분명하니까.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지락至樂>에서)
장자 글에 강신주는 이렇게 토를 달았다.
장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나라 임금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 새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이 끝내는 자신이 사랑하던 새를 죽음으로 이끌고 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오히려 사랑하는 타자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노나라 임금이 사랑하는 새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새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결국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이학사, 271~273쪽)
결국 둘이라는 거다. 집착이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종국에는 집착하려 드는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역설을 연출한다. 가깝건 멀건 사람 간의 관계는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해야만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어쩌면 내 악몽은 나라는 영역 속에 여전히 그녀를 가둬 놓음으로써 벌어진 예견된 고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 무의식의 철옹성에 가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이제는 미련없이 풀어줘야 한다는 결론이다. 내 속의 잠재된 나의 그녀가 아니라 그녀로서의 그녀로 멀리멀리 달아나게 냅둬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내 원만한 숙면을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