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선일까

by 김대일

며칠 전 마누라, 막내딸과 저녁을 먹다가 막내딸이 펜싱을 그만두고 딴 고등학교로 편입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펜싱하는 고등학교로 배정받고부터 주욱 이어진 고강도 훈련으로 심신이 고단해져서 너무 힘들다는 넋두리가 입에 밴 막내딸이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다.

막내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비이지만 그날은 정색을 하고서 더 말을 이어가려는 녀석을 가로막고 맞받아쳤다.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포기냐, 인문계로 편입한다고 뾰쪽한 수가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랬는데 아무 계획도 없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두 손 두 발 다 드는 건 너무 경솔한 짓 아니냐…. 아비의 뜻밖의 반응에 놀랐는지 막내딸은 말문을 닫았고 마누라는 숨막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앉았다. 그러고 며칠 동안 아비와 막내딸은 서먹서먹하게 지냈다.

실망이 컸던 것 같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좀처럼 갈피를 못 잡다가 우연히 접한 펜싱에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이랄지 희열감에 도취된 막내딸을 보는 아비는 제 일인 양 더 행복해했다. 숨은 잠재력을 발휘해 특출난 실력을 뽐내며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미래를 상상하는 건 속물적이고 아비나 막내딸 성향에 전혀 안 맞는다. 그저 하고 싶은 걸 원없이 하면서 그것에서 사는 재미를 느끼며 즐거운 인생을 구가하는 역할로 펜싱이 막내딸한테 자리매김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순전히 아비의 착각임이 들통나면서 창피함과 실망감이 몰려와 일순 정신줄을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무엇이 녀석을 힘들게 해 펜싱의 의미가 변질되었는지, '펜싱하는 막내딸'은 정작 아비가 집착하는 허상이 아닌지, 어떤 결정이 막내딸한테 바람직한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막내딸과 다시 얘기를 나눠 보려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제 저녁, 엄마와 언니가 밤산책을 나가자 둘만 덩그러니 남아 어색하게 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요즘엔 왜 자기와 언니에 대한 글을 안 쓰냐고 막내딸이 불쑥 물었다. 녀석은 아비가 SNS에 글을 올리면 빠짐없이 읽는 애독자다.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행간을 살피느라 고민깨나 했다. 그러다 어제 아침, 대체공휴일인데도 아침 일찍 훈련하러 학교 체육관을 향하는 막내딸한테 문자를 보냈다.

[유빈아, 표현에 인색한 아빠한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망설임 1도 없이 "내 막내딸!"이라고 외칠 수 있단다. 너는 아빠가 존재하는 이유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행여 그 사람을 속박하거나 소유하려 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사랑은 내가 하지만 삶은 그 사람이 사는 것이니까.

요 며칠 아빠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혹시 아빠가 너의 미래를 속박하려 드는 건 아닌지 되게 두렵더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네 인생에 개입하려는 건 아빠의 인생 철학과는 전혀 맞지 않아. 그럼에도 왜 아빠는 네가 펜싱을 그만두겠다고 할 때 뜻밖의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실망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펜싱이라는 운동을 하면서 김유빈이라는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존중하며 대단히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아빠가 펜싱을 하는 듯 행복해 보였다. 아빠는 펜싱이 너한테 그런 의미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빠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실망했던 게야.

허나 즐거움이랄지 행복감은 사라지고 펜싱이 하면 할수록 버겁고 힘들며 귀찮아지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감으로 그 의미가 퇴색된다면 계속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그래서 아빠는 앞으로 네가 내릴 결정에 전적으로 따를까 한다. 아빠는 네가 행복하면 뭐든 OK이니까. 다만 아빠와 약속할 게 있다. 무엇을 하든 지금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뒤 실행할 것. 조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아빠, 엄마, 언니와 상의할 것. 시행착오는 되도록 줄이는 게 좋으니까.

아빠 내일 쉬는 날이니까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알았지?

오늘도 화이팅!!]

아비의 마음이 오해없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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