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전역 단상

by 김대일

어제 오전 5시 40분. 다른 날보다 10분 일찍 집을 나서면서 꽂은 이어폰으로 목소리에 관록이 밴 아나운서의 연주곡 제목 설명이 들렸다. 오전 5시부터 1시간 동안은 국악 전문 프로그램 청취시간이다. '풍경이 있는 소리'라는 국악 단체의 연주곡 중 <추전몽>은 '추전에서 꾸는 꿈' 혹은 '추전을 그리는 꿈'이란 의미쯤 되겠다. 여기서 추전이란 해발 855m에 위치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역인 추전역杻田驛이라고 한다. 추전杻田은 '싸리밭'의 한자어다. 국가철도공단에서 추전역을 소개하는 공식 문구는 다음과 같다.

추전역은 1973년 태백선 철도 개통과 함께 같은 해 11월 10일 역사가 신축되며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박공지붕의 옛 추전역사가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고 연탄난로가 있던 대합실이 기념관으로 바뀌면서 추전역에는 상징탑이 세워졌다. '한국에서 제일 높은 역'에 걸맞게 그 높이가 대관령 고갯길과 비슷하며, 연평균 기온이 대한민국의 기차역 가운데 가장 낮아 한여름을 제외하면 항상 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로 추운 역사이다. 그만큼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설경이 특히 아름다워 1998년 시작된 환상선 눈꽃열차가 도착하는 첫 번째 명소이기도 하다. 비록 현재에는 관광열차를 제외한 여객업무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동화 나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역사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추전몽>을 듣고 추전역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지만 눈 쌓인 추전역을 그리며 찾아가고팠다. 대지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어느 겨울날, 시간을 거스르듯 아주 천천히 운행하는 완행열차에 얹혀 지향없는 여행을 떠나는 로망에 추전역이 추가된 건 분명하다. 더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그 역을 완행열차 대신 버스나 자동차로 가야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항상 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로'와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이라는 소개 문구에 꽂힌 내가 설국으로의 꿈,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이른바 '추전몽'으로의 동경까지 포기하진 못한다. 늙은 철도원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서린 눈 덮인 홋카이도 시골 마을의 그 종착역을 언젠가는 꼭 찾아가겠다는 일념을 못 버리듯 말이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 「철도원」은 회한 많은 고지식한 철도원 이야기다. 하얀 눈이 뒤덮인 홋카이도 시골 마을 종착역. 홋카이도 도시와 시골을 잇는 지선은 폐선이 결정됐고 늙은 철도원 역시 정년을 앞두고 있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딸을 잃고 그 충격으로 아내마저 세상을 뜰 때도 태연하게 역을 지킨 그였지만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홋카이도의 눈발처럼 한없다. 곧 초등학생이 된다는 낯선 여자아이, 그 애가 놓고 간 인형을 찾으러 왔다는 곧 중학생이 된다는 아이 언니, 그날 밤 두 아이의 맏언니라며 여동생들을 잘 대해 준 것에 감사해하는 소녀가 차례로 철도원을 찾아오자 그는 '눈의 아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준 유키코의 혼령임을 알아챈다. 유키코는 자기가 살아있었다면 성장했을 지난 17년간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 드려 가족의 그리움을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첫차가 오기 전 눈덮인 선로를 쓸며 도착한 제설차가 플랫폼에 제복 차림으로 깃발을 든 채 눈밭 위에 쓰러져 죽은 철도원을 발견한다.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철도원>은 소설의 서정적이면서 환상적인 면을 극대화했다. 소설이든 영화든 내가 특히 주목했던 건 슬픔을 삭이면서까지 찾는 이 별로 없는 지선의 종착역을 끝까지 지키는 철도원의 고지식함이었다. 도시와 시골을 이어주는 지선이 폐선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철도원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건 덜 편해도 오래되어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경의가 아니었을지.

모든 걸 속도와 편리, 영리로 재단하는 시대로 변질됐지만 세상 풍경을 세밀화로 보고 싶어하는 누군가는 아직 있다. 「철도원」 속 늙은 역장처럼 누군가는 나뭇잎의 색깔과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를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짐짓 기대한다. 설경에 파묻힌 추전역에서 소설 속 고지식한 늙은 역장과 조우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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