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사람 훈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by 김대일

쉬는 화요일 이른 아침, 모친은 전화로 당장 주간보호센터로 오라고 명령했다. 차로 움직여도 1시간은 좋이 걸리는 주간보호센터로 달려가 눈치빠른 센터장이 마련해준 곁방에서 모친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열심히 재활에 힘쓴다지만 여전히 두 다리에 힘이 아니 들어가는 모친을 향해 부친은 새벽 댓바람부터 해서는 안 될 막말을 퍼부었단다. 무엇이 부친을 분노케 했는지 그 빌미가 뭔지 모르니 당연히 영문도 모른 채 당하기만 한 모친은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소싯적에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손찌검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체폭력보다 어쩌면 더 가학적인 언어폭력이 잊을 만하면, 아니 거의 주기적으로 벌어진다. 이번 사달도 으레 부친의 변덕에서 비롯되었음을 잘 알지만 나로서는 그런 부친을 제어할 수가 없다. 평생을 그 빌어먹을 가부장적 위계질서란 망령에 사로잡혀 산 부친을 전향시킬 방도를 찾는 걸 진작에 포기했음을 고백한다. 입에서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게 튀어나오면 개가 또 짖나 보다 무심해지라며 모친을 다독이지만 반세기 넘도록 이어진 폭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기에는 역부족이다.

3대 독자이면서 8녀1남의 막내로 애지중지 자란 처남은 장모 생신 잔치와 관련해 누이들과 감정의 골이 크게 벌어졌나 보다.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면 말수를 되우 아끼는 마누라한테서 처가 사정을 자세히 듣기란 어렵다. 다만 제 딴에는 주도적으로 장모 생신을 챙기려는데 비협조적이자 의절하듯 가족 연락망 전부를 잠정적으로 차단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6월 마지막 주로 잡힌 장모 생신이 행여 파국으로 치달을까 몹시 걱정스러운데 벽창호같은 처남과는 달리 누이들은 모종의 플랜B를 모색 중인 성싶어 그나마 안심이다. 마누라 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옛말 하나 그른 거 없다나. 내내 앳된 청년일 것만 같았던 처남의 나이가 벌써 마흔하고도 중반을 넘어섰단다.

치과를 운영하는 환갑을 넘긴 선배가 치료차 들렀던 나를 원장실로 불러 늘어놓던 넋두리가 기억에 또렷하다. 나이 마흔을 넘긴 사람은 그가 설령 불알친구라 해도 훈수질을 못한다고 했다.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던 어릴 적만 믿고서 오지랖을 떨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란다. 그러니 빌어먹든 훔쳐먹든 사는 대로 냅두는 게 상책이고 그러다 사이가 더 벌어지면 비록 제 살을 도려내듯 마음이 아파도 손절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도 했다. 누가 봐도 이건 아니라고 재고나 교정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해도, 그것이 선의에서 비롯되었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도외시하고 경원시하는 습성이란 머리에 피가 마를 무렵부터 골수에 깊이 박힌 완고한 정체성으로 인해 전향의 의지를 상실해서이고 마흔이란 그 완고함이 완성되는 정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다 큰 사람한테 탄력적으로 사고하기를 바라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여든을 앞둔 부친은 말할 것도 없고 막내 티를 못 버렸다고는 하나 마흔 줄을 넘어선 처남의 처신도 옹졸하기가 이를 데 없는 걸 보면 말이다.

가족은 친구가 아니니 단칼에 절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글을 쓰는 내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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