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지우개 맞바꾸기

by 김대일

오존층을 파괴하는 대표적인 주범인 프레온가스가 배출되건 말건 에어컨에 목을 매는 내가 생태주의자들이 발간하는 『녹색평론』에 경도된 건 모순이다. 머리 깎아주고 못 받은 요금 5천 원 때문에 며칠 동안 원통해하는 내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개조하겠다며 마르크스를 기웃거리는 것도 모순이다. 무엇이 진짜 내 모습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모순덩어리를 자처하면서도 극과 극의 중간쯤에 서서 중심이란 걸 잡아 보려고 애를 쓰긴 쓴다. 극단적인 건 또 내 성향 상 안 맞아서다.

김종철 발행인 작고 뒤 여러 어려움이 누적되어 휴간을 결정한 뒤 1년 반 만에 계간지로 새롭게 복간한 『녹색평론』182호(2023년여름호)를 주저없이 주문했다. 모순이 다시 발동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을 좀 더 깊이, 더 새롭게, 더 감성적으로 읽어나가려는 기획으로 발간된 고병권의 북클럽『자본』시리즈 12권 중에서 3권을 읽는 중이다. 일전에 읽다가 중도에 흐지부지하고 말았는데 다시 집어들었다. 바야흐로 내 모순성을 극대화시켜 보기로 단단히 작정했다.

엊그제 3권의 한 대목이 잔잔하게 반향을 일으켰다. 그 대목은 나란 놈이 결단코 도덕군자가 아닌 게 분명하지만 만약 커트 요금 안 내고 토킨 손님이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와 겸연쩍게 박카스 한 병을 내밀면 여전히 쓰린 속을 꾹 누르고 건네받을 용의가 생겼음을, 이로써 극단에서 중용으로 변모할 자질이 아주 없지 않다는 걸 일깨워줬다. 고스란히 옮겨볼 테니 당신도 변화의 여지가 있는지 점검해 보시라.

공동체가 화폐나 상품거래를 얼마나 경계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환도 있습니다. 폴라니에 따르면 원시공동체에서는 똑같은 물건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지금껏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상품의 교환'을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해 왔습니다. 동일한 상품을 교환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행동이니까요. 사용가치 측면에서 볼 때 상품의 교환이란 각자에게 필요가 없는 물건을 내놓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동일한 물건을 교환했다면 '필요 없는 물건=필요한 물건'이라는 엉터리 등식이 성립하게 되죠. 물론 교환가치 측면에서 보면 등가교환을 했으니 손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은 맞습니다. 상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무런 이익도 남지 않는 일을 하려고 시장에 나간 셈이니까요.

그런데 이게 정말 쓸데없는 짓일까요? 공동체적 인간관계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나는 딸아이가 동일한 문구용품을 친구와 서로 교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디자인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거의 똑같은 지우개를 맞바꾸는 겁니다. 사용가치에도 교환가치에도 변화가 없습니다만, 이런 교환을 통해 둘의 우정은 커집니다. 경제학자의 눈에는 무익한 행동일지 몰라도 아이들은 그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걸 압니다.

폴라니가 원시공동체들에서 이뤄지는 '동일한 물건의 교환'에 대해 말한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실익이 전혀 없는 이런 교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유대를 강화시킴으로써 관계를 더 밀접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교환은 상품교환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리주의적 사고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는 파수꾼" 역할까지 하죠. 가치를 냉철히 따지고 물건을 저울대에 올려놓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그런 관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겁니다.(고병권, 북클럽『자본』3-화폐라는 짐승, 천년의상상,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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