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픈 모성애

by 김대일

집 가까이에 있다는 점방은 늘 밀리는 손님들로 기다리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라고 둘러대지만 장성한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꼭 손님이 밀려서만은 아니란 걸 깎새는 직감했다. 깍짓동만 한 덩치에 더부룩하다 못해 밀림같은 머리털을 보자마자 우선 먼저 질려 버렸다. 거기에 맹한 표정에 방관적 태도로 일관하는 아들이란 남자의 행동거지로 미루어 무척이나 까다로운 작업이 될 성싶어 긴장했다. 정정해 보이긴 해도 늙은 티는 숨길 수가 없는 엄마는 마치 자기 머리를 내맡기듯 꼼꼼하게 주문했지만 그런 엄마의 세세한 간섭이 아니고서는 아들의 일상적인 생활 영위가 또한 어렵다는 반증같아 안쓰러웠다.

늙은 엄마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장성한 아들의 동행을 2년 전 이맘때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이용학원에서 무료 이발 봉사를 하던 무렵이었다. 자폐성 장애를 겪는 쉰다섯 먹은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지팡이가 없으면 걸음조차 힘겨운 허리까지 굽은 노모의 복잡미묘한 표정은 쉬 잊혀지질 않는다. 죽지 않는 한 끝이 보이지 않을 고단한 모성애. 허나 아들 걱정에 죽어서도 눈을 고이 감지 못할 애달픈 모성애. 엊그제 본 모자와 2년 전 모자는 참 많이 닮았다.

(2021.07. 02.)

자폐성 장애를 가진 쉰 다섯 먹은 아들을 데리고 늙은 엄마가 무료로 이발을 해주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이용학원엘 지팡이를 짚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올라온다. 내가 면허반과 커트 실무반을 병행하기 시작한 작년 가을 무렵 그 모자를 처음 봤다. 금방 덥수룩해지는 머리카락은 풍성한 모량도 모량이지만 짐승털마냥 빳빳하고 거칠어서 깎는 데 무진 애를 먹는다. 방문하는 이용객을 학원생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깎아 주다 보니 아들이 내 차례였던 적은 끽해야 한두 번이었다. 다만 그 아들이 이발하는 동안 늘 고개를 숙인 채 한쪽 구석에 앉았는 늙은 엄마가 자꾸 눈에 밟히긴 했다. 어제는 마침 내 순서라 아들 목에 커트보를 두르고 늙은 엄마한테 말을 걸었다.

- 아드님 혼자서 머리 깎으라고 하이소.

- 꼭 데불고 가라고 성환데 될 일이겠능교.

- 평생 이럴 순 없을 낀데.

- 세 살 아래 동생이 하나 있긴 한데.

- 동생은, 괜찮은가 보죠?

- 멀쩡합니더. 장가 가서 낼모레 출가시키도 될 다 큰 딸내미도 있으요.

- 근데 뭔 걱정입니꺼?

- 제수가 저런 시숙 델꼬 댕기겄소?

늙은 엄마가 원하는 대로 아들 머리를 깎아 주는 게 당장 내가 할 소임이다. 이왕이면 그 나이에 맞는 중후하면서 단정한 스타일로 꾸며 이 땡볕에 어려운 걸음을 한 모자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다. 이발을 마무리한 뒤 늙은 엄마를 불러 어떠냐고 물었다.

- 됐심더. 잘 깎았네예.

늙은 엄마 말이 끝나자마자 쉰 다섯 아들도 거들었다.

- 씨언하다!

- 그기 뭐꼬? 슨생님한테 고맙다고 해야제.

- 고맙슴다!

두 눈은 땅바닥을 응시하고 고개만 까딱하는 감사 인사가 정겹긴 처음이다.

- 어무이, 내가 8월 말까지는 이 학원에 있을 낍니더. 오늘 이발했으니 7월 말, 8월 말 두 번은 내가 아드님 머리를 책임지고 깎아 줄 테니 꼭 나한테 깎겠다고 하이소.

평상시 무료로 이발하러 들르는 이가 여러 수십 명에 달하니 쉰 다섯 먹은 아들도 그 중 한 명일 뿐이다. 하지만 내 보잘것없는 솜씨가 누군가에게, 이를테면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지 않고선 보행이 힘든 허리까지 굽은 노모와 그 자폐 아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 중 하나를 일소시켜 주는 사소하나 유익한 이바지임을 그들을 통해 깨닫게 되어 도리어 은혜롭다.

누구에겐가 힘써 베푸는 일(보시布施)은 우리의 뇌에 다른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지고한 쾌락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베풀도록 해주는 존재의 발에 입을 맞추며 경배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성석제, 「즐겁게 춤을 추다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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