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며칠 풀이 죽었더랬다. 북적거려야 할 점방은 한산하기 그지없어 이번 달 매상 걱정이 태산인데, 어떤 팟캐스트를 듣다 서울 대치동 한 일타 강사는 200억 소득 신고를 하고 강남 노른자 건물 백수십억짜리를 현찰로 샀다는 대목에서 나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자괴감에 휩싸였다. 갑자기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입맛도 뚝 떨어져서 사람이 이렇게도 말리는갑다 싶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반전 계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던 찰나, 이 시를 발견했다. 아포리즘을 연상시키는 간결함 속 웅숭깊음이 매력적인데다 자신의 시에 대한 시인의 해설이 더 인상적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기록 중에 경청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수용소에도 티타임이 있었다고 한다. 몇 번 우려낸 형편없는 차였지만 하루에 한 번씩 차가 배급됐다. 티타임에 수용소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차를 단숨에 들이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차를 절반 남겨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했고, 후자는 ‘최소한의 인간적 체모’를 지키려 애쓴 것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까. 놀랍게도 후자 쪽의 생존율이 더 높았다. 브라이언 보이드가 쓴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의 옮긴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남겨 자기 얼굴을 씻는 행위가 자기성찰, 즉 시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보이드에 따르면, 시를 포함한 예술은 사치나 장식이 아니라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응의 산물이자 인간 생활의 핵심이다. 예술이 진화와 무관했다면 예술은 벌써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동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아껴 자기 몸을 청결히 한 사람,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그렇다. 문제는 자존감이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삭막해진 근본 이유 중 하나가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껍데기만 사람이다. 동물에 가깝다. 대체 무엇이 자존감을 앗아갔는가. ‘돈이 최고’라는 시장전체주의가 주범일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나쁜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다. 자기성찰 능력이 없는 팽창적 자본주의가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그렇다면 미래는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다른 미래로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 안에 있다. 다름 아닌 시다. 우리는 태어날 때 누구나 시인이었다. 우리에게는 시의 마음이 있다. 우리가 돈에 눈이 어두워 시장전체주의의 미로 속을 헤매는 ‘영혼 없는 소비자’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다. 시가 그 실이다. 시의 끈을 놓지 않으면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이문재,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편>, 한겨레, 2016.03.11.에서))
서울 회기동 시장 골목을 지나다가 우연히 보았다. 입간판에 영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To the world you may be one person, but to the one person you may be the world.
-Bill Wilson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