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장임을 알고부터는 공연히 친한 척 구는 손님은 서너 달 전부터 매달 드나드는 대장암 투병 환자다. 근처 백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그는 한때 서울 강남에서 잘나갔던 요리점 대표이자 셰프였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고는 과연 강남 아무개 동이 소재지인 요리사 자격증을 보여주며 명토를 박았다. 나긋나긋한 서울 사투리를 쓰지만 병세로 인한 신경질적인 표정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인물이다.
강남에서 잘나갔는데 굳이 부산까지 굴러와 투병할 건 뭐냐고 물었더니 과거는 과거일 뿐이랬다. 토로하자니 뼈저리게 구구절절한지 기초수급대상자로 전락한 그 연유는 건너뛰고 부산 이 동네로 이사온 지 몇 달 안 되었다고만 퉁쳤다. 가장이 아파서 가족들 근심이 크겠다는 깎새의 위로는 "총각입니다"란 한마디로 넌센스가 되어 버렸고.
의지가지없는 타향살이를 하다 동갑내기를 말벗으로 만나서인지 과분하도록 살갑게 굴지만 그게 깎새는 부담스럽다. 시난고난하는 투병기를 점방 들를 적마다 나불대는 건 넋두리이라기보다 공치사처럼 들릴 지경이다. 그 가벼운 입으로 암에 대한 경각심을 드러낼 때의 경박함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듣다 보면 없는 병까지 만들 판이니. 한두 번 받아주다가 덧정없어진 깎새는 이후로는 손님이 뭐라건 묵묵히 바리캉에만 몰두한다.
엊그제는 커트보를 두르다가 술냄새가 진동해 깎새는 제 코를 의심했다. 아직 아침 나절인데다 암환자한테서 술냄새라니. 허나 깎새는 개코였다. 암환자는 심사가 울적해진 나머지 밥 대신 페트병 맥주 하나를 까고 왔다고 실토했다. 치료차 일주일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길이라면서.
- 암만 그래도 불편한 분이 식사까지 거르고 술이라니.
- 그러게 말입니다.
대화의 물꼬가 트인 김에 더 이어가려는 수작임을 눈치챈 깎새는 얼른 관심을 일절 걷고 작업에만 열중했다.
만날수록 기운 빠지는 사람은 사절이다. 그러는 깎새 본인도 썩 건설적인 위인은 못되지만 때 이른 죽음의 그림자를 업고 다니는 걸 자랑인 양 뻐기고 다니는 절망적인 사람과는 좀 매정해도 선을 긋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 마음 단단히 먹었다. 돈 내고 머리 깎겠다고 찾아오는 것까지 말릴 수야 없지만 말은 그만 섞었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