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남은 자루의 펜을 꾸역꾸역 담은 필통과 손바닥만한 수첩이 짊어지고 다니는 백팩 속에서 터줏대감 노릇으로 여념이 없다. 길을 걷다가 혹은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 중에 특기할 뭔가를 포착하자마자 잽싸게 스케치하듯 기록해 나갈 때의 흥분은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쾌감이어서겠다. 키 하나로 수정과 복제, 소거가 단박에 이뤄지는 스마트폰이나 PC가 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하얀 백지 위에 썼다가 지우고 그 밑에 다시 끄적이면서 전개해 나가는 생각의 점층은 은근히 유익하기도 하거니와 레트로 감성까지 더해져 이들을 내팽개치질 못한다. '몽당연필이 가장 좋은 기억력보다 더 낫다'는 서양 속담은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겠지만 그 기록의 전위대로 몽당연필을 앞세우는 데는 나름의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도 싶다.
막내딸이 현장학습을 다녀와서 자랑스럽게 꺼내 놓은 게 캘리그래피였다. 손글씨로 아름다움을 구현한 시각 예술. 현장에서 급하게 배운 뒤 써제낀 것 치고는 그럴싸했다. 글씨는 그저 생각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내 고정관념에 균열이 이는 순간이다. 물론 글씨 쓰는 방법, 즉 서도를 철학적 문제로 확장시킨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며 필재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명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美’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만약 필재가 뛰어난 사람이 그 위에 혼신의 노력으로 꾸준히 쓴다면 이는 흡사 여의봉 휘두르는 손오공처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경우는 관념적으로나 상정될 수 있을 뿐, 필재가 있는 사람은 역시 오리새끼 물로 가듯이 손재주에 탐닉하기 마련이라 하겠읍니다.
결국 서도書道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우기 글씨의 훌륭함이란 글자의 자획字劃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먹墨 속에 갈아 넣은 정성의 양量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리라 생각됩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43~144쪽)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각視角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첩경捷徑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旣存과 권부權富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 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같은 책, 144쪽)
만약 인상깊은 글귀나 시구를 자신만의 독특한 캘리그래피로 정갈하게 써서 선물한다면 그걸 받은 사람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본다. 서도를 갖춘 필재의 훌륭한 글씨가 아니더라도 캘리그래피로 쓰여진 곡진함이 전해진다면 그보다 더 뜻깊은 선물도 없지 않을까? 자, 이리 장황하게 지껄이는 까닭을 눈치채셨는지? 그렇다. 캘리그래피를 배워 보고 싶다. 내가 쓴 글을 캘리그래피로 기록하는 날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