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번

by 김대일

며칠째 내리는 장맛비로 점방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자포자기하듯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홀가분하기는 한데 울적해지는 심사까진 어쩌지 못했나 보다. 속시끄러운 TV는 음소거를 해 버리고 라디오 앱을 켰는데 마침 귀를 간지럽히는 아는 멜로디가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흥얼거리다가 아는 가사라 내처 따라불렀다.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지만 민폐 끼칠 염려는 없었다. 근자에 개점 시간이 부쩍 늘어진 바로 옆 국수집은 비가 좀 온다 싶은 날엔 아예 접기도 하던데 이날이 바로 그날인지 인기척 하나 안 들렸으니까.

용이가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 함께 어울릴 때다. 거하게 한 잔 걸치고 노래방만 갔다 하면 꼭 스티브 원더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불러보라고 옆구리를 찌르곤 했다. 흥에 겨워 모르텐 하켓 버전 <Can't Take My Eyes Off You>까지 연이어 불러제끼면 내 노래방 팝송 레퍼토리는 완성된다. 녀석은 그 노래들이 십팔번인 줄 아는가 보더라만, 단연코 아니다. 분위기 조지는 숭물이 되기 싫어 알아서 기었을 뿐 내 팝송 십팔번은 따로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버전인 <Can't Help Falling in Love>,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 <Anything That's Part Of You>나 영어로 따라부르기가 달리면 차중락이 번안해 부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따위 엘비스 프레슬리 일색이다.

열거한 노래들을 찾아 들어보면 직감할 테지만 구닥다리에 궁상맞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들이다. 반면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풍경의 뒷배경을 자처한다면 아주 안 어울리는 노래는 또 아니다. 하여 노래방에서는 언감생심일지 몰라도 헤실헤실한 점방에서 혼자 기분 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레퍼토리다.

'십팔번(十八番)'의 유래는 일본 이찌가와(市川)라는 배우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교요겡(狂言, 재미있는 희극)'이라는 극에서 시작된다. 그 극은 신구(新舊) 각각 18번까지 있으며, '노오가꾸(能樂)'라는 고유 가면극의 막간에 보여 주는 촌극(寸劇)이다. 그리고 그 촌극마다 번호가 있는데 그 중에 18번이 가장 재미있고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생겨난 말로써 일제 때 우리나라에 전해져 흔히 애창곡, 단골 노래라는 뜻으로 불리는 단어로 바뀌었단다.

좌우지장지지지 백밴드가 반주 대기 중인 짝자그르한 무대가 됐든 동전 한 닢에 노래 한 곡인 코인 노래방에서든 목청을 가다듬고 한껏 감정을 고조시켜 절창을 뽐내듯 자뻑을 일삼는 십팔번 한두 곡쯤 누구나 흉중에 항시 대기중이기 마련이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라고 앞에서 언급했듯 십팔번이 왜 없겠냐마는 확신이 없다는 게 큰 난관이다. 두루마리 휴지가 산지사방 난무하는 난장판 중에 번차례로 마이크를 넘겨받았는데 점잖은 엘비스가 부른 청승맞은 노래를 꺼냈다가 달아오른 노래방을 일순 이글루로 맹글어 놓고선 부쩌지를 못하는 나를 상상해 보라. 사회성이 결여된 한 인간의 애타는 노래방 오딧세이아가 여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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