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 살면서 국민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똑같은 데를 나왔고 두 살 터울 남동생끼리도 친구인 J와는 썩 친한 사이가 아니다. J가 부산에 살 적에 가뭄에 콩 나듯 만나 술잔을 기울이긴 했지만 신명이 났던 기억은 별로 없다.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인연으로밖에는 정의내릴 수가 없는 J가 흉중 심사를 툭 터놓기에는 뭔가가 아쉬운 존재였고 그래서인지 늘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녀석 생각은 좀 달랐는지 큰 회사가 별로 없는 부산에서 제법 짝자그르한 중소기업에서 오래 근무하던 J가 주재원으로 중국으로 파견된 이후로 잊을 만하면 톡으로 안부를 묻는 정성을 꾸준히 보였다. 지난 주에도 불쑥 부산에 갈 건데 오랜만에 회포나 풀자기에 어제 원래 만나기로 약조를 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건 설레는 일이지만 J는 좀 예외다. 녀석한테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녀석과 연이 닿았던 아주 오래된 과거로부터 톺아봐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지나치다 싶을 만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추켜세우는 에티켓에 능하지만 술자리가 무르익어 취기가 오른다 싶으면 그간 쌓인 앙심을 분풀이라도 하듯 수다스러워지고 톤이 올라가는 녀석의 술버릇이 단서라면 단서일지 모르겠다만. 나와 갖는 술자리에서만 유독 그러는 건지 녀석과 다른 자리에 합석한 적이 없어 알 길이 없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임엔 분명하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나보다 똑똑하고 잘난 놈(대학교가 같다고 다 잘난 게 아니다. 녀석은 인서울 유수 대학 부럽지 않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을 나왔으니까)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한테 술주정을 부리는지.
그제 일요일 밤 잠들기 전에 또 불쑥 J에게서 톡이 왔다. 부산에 와 보니 어머니 병환이 깊어 당장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겠으니 다음에 만나자며 양해를 구했다. 10년 넘게 문지방이 닳도록 모친을 모시고 병원을 왕래했던 선험자로서 충분히 이해한다며 위로했다. 어차피 지금 우리 나이에선 부모 건강은 변수가 아니고 상수니 괘념치 말라면서.
아무튼 J와 재회는 불발이 됐다. 슬쩍 아쉽기는 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중국 넘어간 지 10년이 다 된 J는 어떻게 변모했을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