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돈

by 김대일

눈먼돈에 흔들렸던 적이 있었나? 여지껏 두 번 있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할 무렵이었으니까 20년도 한참 전 일화다. 회사 소유이거나 임차한 부동산을 관리하는 업무로 보직이 바뀌고 나서 얼마 안 지났을 무렵이었다. 서울 신설동의 한 건물에 들어가 있던 지점엘 들렀는데 건물 소유주가 호출을 했다. 건물주가 일개 대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나 의아했지만 일단 만나러 갔다. 인사를 마치자 다짜고짜 봉투를 꺼내 손에 쥐어주면서 식사비로 약소하다고 했다. 봉투 안에 든 게 뭔지 대충 감이 왔지만 처음 당하다 보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그냥 들고 나왔다. 봉투 속에는 10만 원짜리 수표 20장이 날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다.

한 이틀 밤잠까지 설쳐 가며 고민했다. 견물생심이 안 일었다면 내가 부처, 예수게? 꿀꺽 먹어 버리고 싶어 미치겠는데 왠지 께름칙했다. 이전에는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부동산관리 업무라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어리보기이긴 했지만 임대인이 임차인한테 아부 떠는 건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뀌었다는 것쯤 모르지는 않아서였다. 나중에 단단히 코가 꿰일지 모르겠어서 고참한테 실토했다. 고참도 살짝 고민하는 눈치였다. '없던 일로!'라고 일언지하에 잘라 말하지 않고 '생각 좀 해보자'며 미적거렸던 걸 보면 말이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둘이서 꿍꿍대며 한 이틀을 더 끌고서야 되돌려 주자는 결론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지체없이 고참을 앞세우고 신설동 건물로 가서 건물주를 만나 정중하게 되돌려 준 뒤 그날 저녁 고참하고 뒤풀이를 가졌다. 목울대로 넘어가던 소주맛이 유난히 달콤쌉싸름해서 참 기묘했던 걸로 기억한다.

오래된 일이라 상세한 내막은 가물가물한데 아마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와 신설동 건물주 간에 송사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니 건물주는 정보란 게 필요했을 테고 마침 그 회사 직원이란 녀석이 어리숙하게 보여서 용돈 몇 푼 쥐어주고 프락치로 부려먹으려는 계략이었던 게다. 오죽 만만하게 봤으면 일말의 거리낌조차 없이 돈봉투를 내밀었을까 자괴감이 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어렵다는 탐심을, 비록 며칠 걸리긴 했지만, 보기좋게 걷어찼다는 대견함이 더 컸었다. 내세울 만한 거 없이 쭈뼛거리기 일쑤지만 중심만은 꿋꿋하게 서 있다는 기백은 덤이고.

7년 전, 부산 온천장 부근에 요양병원을 근거지로 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나른한 오후에 낯선 번호로 휴대폰이 울렸다. 부산은행 아무개지점 직원이라고 밝힌 여자는 500만 원이 내 계좌로 잘못 입금됐다며 몹시 난처한 사정을 무척이나 절제된 목소리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불러주는 계좌번호가 귀에 선뜻 들어 오지 않아 장롱 속 휴면 계좌라 직감했다. 당장 해당 계좌 통장이나 카드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처리 방법을 알려 달라고 되물었더니 여자 은행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거의 반사적으로 ‘번거로우시더라도’ 가까운 지점으로 꼭 내방해 계좌 속 돈을 원래 주인에게 송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은행 직원이 알아서 처리해준다고 명토를 박았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제일 중요한 줄 알면 송금할 때일수록 재차 삼차 수취인 확인이 필수인데도 대뜸 보내고 보는 정신머리 훨훨 가출한 송금인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TV 프로에서나 봄 직한 '세상에 이런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걸 보니 한순간 실수로 생때같은 돈을 날릴 판인 상대방의 애타는 심정을 나몰라라 하진 또 못하겠더라.

솔직히 은행 문에 당도하기 전까지 엄청 망설였다. 흑심이 일긴 했다. 낙장불입이라고 했잖은가. 누구 명의로 보냈건 내 통장에 찍혔으면 이미 내 돈이다. 마음 바뀌어 발걸음을 돌린다고 한들 누가 나를 제지할 텐가! 하지만 그러다 말았다. 엉두덜거리는 미련을 다잡자니 진이 다 빠질 노릇이었지만 어느새 다소곳이 창구 앞에 앉은 나는 달관한 사람인 양 굴었다. 전후사정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내 신분증만 보고서 일사천리로 업무를 처리해 나가던 은행 직원은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조아리는데 제법 진심이 어렸다. 송금 오류가 비일비재한데도 회수가 쉽지 않다는 설명에 움찔했다. 자기 계좌에 눈먼돈이 느닷없이 박혔다는 사실을 알고난 직후부터 연락 두절이 다반사이지만 그런 수취인을 처벌할 근거가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오류든 뭐든 한번 들어온 돈의 소유권은 입금된 계좌 소유주에게 귀속되다 보니 회수하려면 계좌 소유주의 양심과 아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도 전했다. 해당 은행이 양자 간의 분쟁에 끼어들 만한 어떤 법적 근거는 없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은행법을 잘 아는 은행 직원이 설명하니 그런가부다 일단 수긍은 했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비켜서서 제3자 운운하며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는, 그러면서도 수수료란 수수료는 일일이 따박따박 다 받아챙기는 간사함이 은행의 본질이라고 자인한 꼴로 비춰져 썩 유쾌하진 않았다.

재송금을 위한 일처리가 거의 끝날 무렵 송금인이 약간의 사례금을 보내겠다고 해서 편한 대로 하시라는 말만 남기고 무심한 척 은행을 나서려 했다. 등 뒤에서 직원 두어 명이 두 옥타브쯤 올라간 톤으로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를 연호해서 살짝 우쭐했다. 얼마 뒤 사례금 5만 원이 계좌로 들어왔다. 롤 케이크로 사무질 직원들한테 한 턱 쐈다. 타의긴 해도 눈먼돈 덕분에 그럴싸한 미담이 한 편 완성됐다. 돈이 매력적인 조연으로 빛나는 순간이었다.

내 요행에 눈먼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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