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호칭

by 김대일

원래대로라면 광복절이 낀 주에 들렀어야 할 단골은 배우 손석구 인상을 풍긴다. 왜 늦었냐고 장난기 섞인 타박을 했더니 의아해한다.

- 광복절 낀 주에 휴가갈 지도 모른다고 그 주는 아예 오지 말라고 사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정신머리하고는.

- 나이 드니까 깜빡깜빡한다우. 그러는 손석구씨는 휴가 다녀 오셨고?

1박2일로 대전 장인집엘 다녀왔다고 했다. 좀 이상했다. 일전에는 부산 처가집 어쩌구저쩌구 했었는데.

- 처가집이 엄청 부잔가 보네요. 별장처럼 부산집, 대전집 지역별로 한 채씩 있으니.

오래전에 이혼해서 장인은 새장가 들어 대전에 산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집엘 휴가차 들렀다는 거다.

- 용케 왕래가 되네요?

와이프가 대전집과 스스럼없이 지낸다고 했다. 하지만 손석구씨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장인은 그렇다 치고 장인과 새로 부부연을 맺은 분, 또 그 두 분과 함께 사는 스물여덟 살짜리 딸을 대하는 품이 전혀 늘지가 않아서다. 술이나 잔뜩 마셔서 그 취기에 기대 어색한 분위기를 눙치면 좋으련만 썩 즐기지를 않아서 네 사람이서 부어라 마셔라 기분낼 때는 영락없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만다.

- 가잔다고 군말없이 따라가는 사람이 용한 사람 아니우? 백 점짜리 남편이자 사위구만.

- 휴가라고 딱히 갈 만한 데가 안 떠오르고 전부터 휴가 때 꼭 들르라고 하도 성화여서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점방 드나드는 손님을 기억해내려고 제멋대로 착안한 방법 중에 도플갱어식 연상법이 있다. 얼굴깨나 알려진 유명인과 비슷한 구석이 포착되면 그와 똑 닮았다고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고 그걸 또 손님한테 입방정을 찧고 까불어 댄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미남형, 호감형 면상을 지녔거나 인물은 좀 빠지더라도 스캔들 따위 잡음이 없는 평판이 무던한 셀럽을 들먹거려야 "에이, 설마 그럴라구" 손사래를 쳐도 손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며 흐뭇해하는 걸 목격할 수 있고 큰 힘 안 들이면서 단골로 만들 수가 있다.

손석구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영화 <범죄도시 2>가 동시에 흥행에 성공하면서 포텐이 터진 배우로 대체로 알고 있지만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성질머리 더러운 욕쟁이 CF감독으로 분한 손석구에 내 시선은 더 머물러 있다. 특히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 여주인공 중 한 명인 은정(전여빈 분)과 고깃집에서 술 마시는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할 나만의 하이라이트다. 그 장면이 하도 인상 깊어서 글까지 써서 남겼다.

제목이 <멜로가 체질>이랬던가. 세 여주인공 중 은정(전여빈 분)은 옛 애인의 허깨비하고 먹고 놀고 얘기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나 본데 계속 말하지만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아 잘 모르니 설명은 생략하고, 하여튼 잘 나가는 CF감독이면서 은정처럼 전 재산을 기부해 기부계의 양대산맥, 기부계의 두 또라이 중 한 사람인 상수(손석구 분)가 은정과 티격태격하다가 어찌어찌해서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 상수는 여태 말하지 않았던 서로의 얘기나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드라마 수록곡인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거야'만 들리고 디졸브. 음성은 들리지 않지만 얘기를 하는 은정이나 그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상수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은정이 옛 애인의 허깨비와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놓는 걸 이해하려는 듯 보였다. 배경으로 깔리던 음악이 그치고 장면이 전환되자 상수는 은정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른다. 그리고 잔을 들면서 말한다.

- here's looking at you, kid.

의아해하는 은정을 보면서 덧붙인다.

- 카사블랑카에 나온 대사야. 우리나라에서 참 멋지게 번역됐지.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난…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잔을 드는 상수. 맞춰 줘야 하니까 은정도 짠이나 하려고 잔을 든다. 상수는 그 잔을 지나쳐 은정의 눈에 잔을 가져다 댄다.

수배자의 인상착의(특히 눈매)를 기억해뒀다가 체포하는 우치무라나 무엇을 보건 이해하겠노라며 은정의 눈동자에 건배를 하는 상수나 두 눈을 통해 상대를 알아챘다. 다른 데는 몰라도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나 보다. (내 글 「here's looking at you, kid」에서)​

은정의 눈동자에 소주잔을 갖다댈 때의 서글서글하면서 선한 손석구 눈매가 그 손님과 똑 닮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혹시 손석구라는 배우하고 닮았다는 소릴 안 듣습니까?"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왔고. 처음 본 깎새한테서 별소리 다 듣는다는 듯 얼떨떨해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이후로 점방을 찾을 적마다 나는 어김없이 '손석구 닮은 분'이라고 아는 체를 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한테 자그마한 재미를 선사해줬다면서 고마워하면서도 한번은 "와이프가 배를 잡고 웃어요. 머리만 깎고 오면요" 짐짓 울상이길래 까닭을 물었더니,

- 하고많은 배우 중에 손석구 닮았다는 사람은 커트점 주인밖에 없다면서요. 어딜 봐서 손석구냐고 막 웃어요.

- 와이프한테 <나의 해방일지> 구씨 아저씨, <범죄도시> 강해상 말고 <멜로가 체질> 상수로 나오는 손석구를 보라고 하세요. 판박이라니까.

그건 그렇고 호칭 문제가 내내 궁금해서 아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 장인과 같이 사는 분을 뭐라고 불러요?

- 그게 제일 버거워요. 입이 안 떨어져서요. 그러니 말을 잘 안 해요. 묻는 말에 대답만 하지.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를 알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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