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평짜리 새 아파트를 장만한 김은 각시만 구하면 된다. 쉰 넘은 노총각한테 긴긴 밤은 고역 그 자체인 데다 그 넓은 집에서 혼자서 축구놀이 할 거 아니라면 하루라도 빨리 천상배필을 만나야 하겠지만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뚜쟁이로 나설까 하다가 불쑥 떠오른 옛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마음 접었다. 호기롭게 중신을 섰다가 술은커녕 들입다 귀싸대기만 터졌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냐면서 중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 다신 함부로 나대지 말라고 엄중 경고하던 이는 그간 쌓은 인연까지 독하게 끊어 버렸다. 그러니 득보다 실일 공산이 큰 짓을 구태여 자청할 까닭이 없다.
4년 전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전향한 김은 기간제 교사 시절보다는 확실히 말쑥해졌다. 신수는 말끔하고 입성은 한결 세련되게 변했다. 하지만 구질구질했던 겉보기를 일신했다 한들 속내에 잠재한 회한까지 일소하지는 못했는지 김은 여전히 침울했다.
기간제 교사를 그만두기 3년 전에 부임한 부산 아무개 여고에서 김은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다. 기간제 교사 능력이 암만 출중하다 한들 나이가 들면 활용도가 떨어진다. 기간제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듯 임시직이라는 꼬리표에 수완서껀 경력 따위는 큰 의미가 없다. 뜨내기신세일지언정 그마저도 불러 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불안하고 암담한 미래 때문에 김은 늘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와중에 같은 과목 정교사가 학기 중에 퇴직을 신청하는 행운이 찾아왔다. 김은 마지막 기회라고 직감했다. 그렇다고 요행을 바라지는 않았다. 늘상 그러하듯 맡은 바에 충실했고 성심성의껏 학생을 대했다. 교직원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데다 김의 고교시절 은사였다는 교장까지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김은 정교사 발탁까지 8부 능선을 넘어선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서울 유수 사범대를 나온 경력 일천한 새파란 애송이로 낙점이 됐고 그제서야 토끼 사냥이 끝나자 삶아 먹히게 된 사냥개 신세나 자기나 별다를 게 없다고 뼈저리게 깨닫자 교사라는 직업에 넌더리가 나고 말았다.
정교사 불발로 촉발된 자기모멸감은 의외로 오랫동안 김의 의식 전반을 지배했다. 안으로만 삭이는 기질이라 표 날 리 없을 성싶었지만 그 여파는 당시 김과 제법 잘 어울렸던 같은 과 3년 후배인 그녀에게까지 미쳤다. 그녀는 전도유망한 정교사다. 교육행정에 관심이 많아서 장학사로 전향해 교육청에서 근무중이다. 그녀가 김을 마음에 담았던 때는 김이 제대 후 복학해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학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야 그저 밥 잘 사주는 친절한 선배한테 품은 호감이었겠지만 교직 생활이라는 공감대를 이루면서 어려운 여건임에도 교사를 천직이라 여기고 우직하게 갈 길 가는 김을 보며 연모가 싹텄을지 모를 일이다. 기간제라는 꺼풀을 쉬 벗기지 못하는 건 운이 나빠서이지 능력 탓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김과 미래를 기약하자니 기간제라는 장애물을 모른 체 할 수야 없지만 그게 결격사유일 리는 만무했다.
김칫국만 양껏 들이켠 뒤부터 없는 정까지 다 떼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김은 그녀한테 모질게 굴었다. 같은 과를 나온 선후배 교사 친목 모임에서 맥주 한두 잔이 치사량인 김이 고량주 두 병을 벌컥대고 나서 험악한 소리만 골라서 그녀에게 내질렀다. 남자의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치유가 쉽지 않을 지경으로 그녀는 내상이 깊었다. 그로써 그녀와 김은 오래된 유대에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그러고 몇 해 지나 김은 사회복지공무원이 되었다.
한번은 저녁 식사나 함께 하자며 김이 그녀에게 조심스레 연락했다. 그녀는 정중히 사양하면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순간 김은 무척 당황했었다고 실토한다. 둘 사이 오간 통화 내용을 좀 더 촘촘하게 듣고 난 뒤 내린 결론은 그녀가 짐짓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통속소설이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수작이랄까. 그녀는 그럴 만했다.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안긴 김을 복수하는 차원이거나 김이란 남자한테 이미 만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 정확하게 이것이라고 꼬집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아직은 서로가 서로에게 질척대는 듯한 요상한 분위기는 둘 다 공히 관계를 청산할 마음이 별로 없다는 혐의만 짙게 만들었다. 관계 복원이 의외로 낙관적일 거란 의미로도 읽힐 대목이다.
김을 만난 뒤 자발없는 오지랖이 발동했다. 사랑의 메신저 노릇을 자처하면서 말이다. 현재 그녀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안다. 그녀가 적을 둔 곳으로 현재 김이 품은 심정을 곡진하게 담은 서신을 보내면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술 대신 뺨만 죽도록 얻어맞는 중매쟁이는 어찌어찌 견디겠지만 괜한 오지랖으로 김과 이어진 30년 인연은 끊기고 싶진 않으니까. 무엇보다도 결자해지는 당사자인 두 남녀가 하는 게 맞다. 구경꾼 신분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