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낯선 40대 손님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방방 뛰었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깎새가 무도하기 짝이 없어서다. 커트 도중 바리캉에 관자놀이 쪽 옆머리가 슬쩍 잘려 나간 건 묵과할 수 없는 불찰임에도 작업 끝났다고 얼른 커트보를 거두려 하자 폭발한 게다. 이런 꼴로 돈 받아 처먹으면 안 부끄럽냐고 욱지르자 그제서야 이상한 줄 알아챈 깎새다. 다시 골라줄 테니 앉아 보시라 했지만 불 난 데 기름 붓는 격이라. 게거품 물고 왜자기더니 5천 원짜리를 집어던지듯 계산하고 나가 버렸다. 5분 뒤, 자기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면서 다시 들어오는 손님.
원래대로 안 만들어 놓으면 알아서 하라고 윽박지르는 손님을 어이없어하는 깎새는 이미 내상이 크다. 숱을 치는 틴닝가위만 몇 번 놀리면 금방 정리되는 손쉬운 작업이란 걸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깎새로서는 마구발방으로 지껄이는 손님에 휩쓸려 대거리를 벌인 감정 과잉을 크게 후회하는 중이다.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된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애꿎은 다른 손님한테 끼칠 악영향을 염려하면 스트레스는 갑절로 는다.
먼저 온 손님 머리를 깎느라 잠시 휴전기를 가진 뒤 문제의 손님을 이발 의자에 다시 앉혔다. 커트보를 치고 머리 다듬는 데 딱 1분 걸렸다. 거울로 손님 동태를 살피니 '어, 별 거 아니네'하는 눈치였다. 세면장으로 향한 손님은 머리를 후다닥 감고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안녕히 계세요' 작별을 고하고는 점방 문을 나섰다. 그런 손님을 같잖게 쳐다보던 깎새는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란 듯 '안녕히 가세요' 대구를 맞춰 줬다.
하지만 여파는 오래갔다. 한바탕 난장을 친 손님이야 이미 가 버리고 없어도 서러움, 노여움이 한데 뒤섞인 뒤끝이 뒤늦게 몰려온 탓에 깎새는 끝내 아퀴를 맺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서로 알 만한 사이였어도 저 난리를 부렸을까. 상대방이 아는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기 머리에 원치 않은 손을 댄 것만으로 대노하는 인간이면 소시오패스나 다름없지만. 이 사달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잠시 제쳐두고 깎새는 불현듯 '케빈 베이컨 게임'을 떠올렸다.
여섯 다리만 건너면 지구에 사는 사람 대부분과 연결될 수 있다는 '6단계 법칙'을 응용해 영화에 함께 출연한 관계를 1단계라고 보았을 때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이 케빈 베이컨과 몇 단계 만에 연결될 수 있는지를 맞히는 '케빈 베이컨 게임'. 로버트 레드퍼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과 함께 주연을 맡았고, 메릴 스트립은 케빈 베이컨과 <리버 와일드>에 함께 출연했으므로 로버트 레드퍼드는 케빈 베이컨과 두 단계 만에 연결이 되는 것이다. 또 줄리아 로버츠는 덴절 워싱턴과 <펠리칸 브리프>를 함께 찍었고, 덴절 워싱턴은 톰 행크스와 <필라델피아>에 출연했으며, 톰 행크스는 케빈 베이컨과 <아폴로 13호>에 함께 출연했으니 줄리아 로버츠는 세 단계 만에 케빈 베이컨에 도달하게 된다는 식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일상화된 요즘에는 '6단계 법칙'가 진부하게 여겨진다. ‘여섯 다리’까지 갈 필요 없이 ‘서너 다리’만 건너면 다 알고 통하는 사이로 엮인 ‘좁은 세상’이 됐다는 조사 결과(한국인은 3.6단계)까지 나온 걸 보면 말이다. 타인을 한두 혹은 서너 다리만 건너면 아는 지인이라고 상정한다면 우리가 겪는 갈등의 상당수가 사라질 것이라고 설파한 칼럼이 기억의 꼬리를 물었다. 이은희 과학저술가가 쓴 <타인과 지인의 사이에서>(경향신문, 2022.04.14.)라는 칼럼을 요약하면 이렇다. 새삭이 씨앗을 맺고 다른 생명의 양분이 된 뒤 흙으로 돌아가지만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른 씨앗으로, 다른 생명으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세상만물은 모였다 흩어지면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자연의 근본적인 원리가 연결, 순환이라면 파편적이고 자연과 유리되어 사는 게 익숙해진 우리는 대상이 무엇이든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면 잔인해지곤 한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단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 명을 가스실로 보냈던 비극은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인간의 타자화는 자신과 상대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규정해 차별과 공격과 착취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상대가 내가 아는 사람, 즉 지인이라고 여긴다면 공격성은 누그러지고 좀 더 나은 관계를 위한 모색에 들어간다.
진실은 고립적인 나, 분절된 나로 보는 인식과는 별개로 우리는 대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지역, 성별, 세대, 사회경제적 위치, 신체상의 특징 등을 들어 공고한 차이를 드러내려 꾀하지만 사실 그다지 뚜렷한 타자화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동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고, 장애를 가질 수도 이를 극복할 수도 있으며, 나이든 이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으며 젊은 세대도 언젠가 다음 세대와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별은 뚜렷하게 나뉠지 몰라도 이성이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긴밀한 관계로 엮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다르고 분절된 각자의 영역 속에서만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 어떤 이들조차 완벽하게 분절된 존재로 타자화시킬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연관을 맺고 있다. 타인이 아닌 긴밀한 관계로 연결된 지인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관점의 변화만으로도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의 상당수는 사라질 것이다.
그 손님이 깎새 점방을 다시 찾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둘이 다시 만나지 말란 법도 없다. 세상은 이미 좁아질 대로 좁아졌으니까. 만약 한두 혹은 서너 다리를 건너 둘이 재회하는 장면이 전혀 비현실적이지만은 않다고 냉정하게 여기기만 했어도 구태여 기력을 낭비할 까닭이 없었을 게다. 쉽진 않았겠지만. 깎새는 그걸 후회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