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 의미하는 것

by 김대일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택배가 오면 보통은 현관문 앞에 두고 가는데 1층 로비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손님 뜸하자 큰딸한테 연락했다. 다니는 토익 학원을 가기에는 일러서 집이면 얼른 1층으로 내려가 택배를 가져 오라고 조바심을 냈다. 큰딸은 이미 밖에 나와 있어서 당장 갈 수 없지만 1층에 둬도 들고갈 사람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혹시 모르니 다시 확인해 보랬다.

암만 생각해도 미심쩍어서 운송장 번호로 배송 조회를 해봤다. 경기 김포에서 서울 구로로 가는 택배였다. 고로 아무 상관이 없는 택배였다. 택배 기사가 배송을 완료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수령인 전화번호가 잘못 입력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 잘못 갔대 문자가.

- 그럴 줄 알았어.

- 그럴 줄 알았다니?

- 올 데가 없잖아.

보골이 났지만 사실이었다.

- 이 아빠 아직 안 죽었어. 이번 추석 때 눈 먼 선물 들어올는지 혹시 아나?

- 어련하시겠어요.

살짝 설렜었다. 손님 머릴 깎으면서도 누가 뭘 보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들떠 있던 정신머리였다. 돌연 물욕에 눈 뜬 건 아니지만 명절 선물이 왔다는 소식은 어렸을 적 세뱃돈으로 한몫 잡은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다. 퇴근해 실물을 영접한 뒤 선물을 보낸 이에게 어떻게 감사치레를 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헌데 이 모든 게 헛된 망상이었으니 허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다.

도둑놈 심보도 유만부동이지 이쪽에서 보낸 게 없는데 받기를 바란다? 지나가던 개가 웃지. 어지간히 무심한 놈이긴 해. 명절 핑계 대고 때때로 안부 물었으면 그 성의에 감복해 식용유나 스팸 세트 따위로 응답할 마음 여린 지인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 수고란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았으면서 바라는 것 자체가 가소롭다.

어쩌면 선물이라는 실물에 기대어 바라는 게 따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마르셀 모스라는 인류학자는 의례적인 선물 교환이 전통 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고 증여는 필연적으로 답례, 곧 '대갚음'(reciprocity)를 전제로 한다고 했다. 그런 선물의 목적이 연대의 창조와 재생에 있다고 또 다른 인류학자는 주장했다(마르셀 에나프). 의례적 선물 교환이 “상호 인정을 위한 조건”으로서, 친밀한 유대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증여자는 자신의 일부를 선물로 주는 행위를 통해 서로를 동료, 동맹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시작한다. 받은 이는 상호 대갚음을 통해 이를 이어가는데, 이는 ‘빚진 것을 상환한다’는 개념과는 그 맥락이 전혀 다르다(<돈이 아닌 선물로 결속하는 인간 공동체>, 한겨레, 2018.08.02. 기사에서).

선물이 주는 유대감으로 소외감을 불식시킨다. 잊혀지지 않았다는 새삼스러운 재발견에 감사하고 흐뭇해한다. 어쩌면 선물이라는 실물보다 '너를 기억한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제가 따른다. 인정받고 싶다면 먼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당장이라도 전화번호부를 뒤져 안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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