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이정록
실타래 뭉치하고
백옥 실패 하나씩 갖고 태어나지.
그 실마릴 놓치지 않으려고
빈주먹 옹송그리고 탯줄 벌겋게 우는겨.
엉키고 꼬이는 실마릴 요모조모 풀다 보면
그 끝자락에 무슨 값나가는 옥패가 나올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실마리 푸는 재미지.
뭔 횡재하려고 욕심 부리면 안 되는 겨.
뭔가 나오겄지 언젠간 나오겄지 하고 견디는 거여.
실 꾸러미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실속 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게 그 중 실속 있는 겨.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너 한 번 더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는 겨.
(명절이 코앞이면 떠오르는 시인이 둘 있다. 이정록과 오탁번이다. 두 시인은 비슷하다. 충청도 말투가 시어에 녹아들어 정겨움을 증폭시킨다. 게다가 해학적이기까지. 두 시인이 명절을 글감으로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시든 명절 기분이 나지 않으랴. 나만 그런가.
아무튼 추석 시즌을 맞았으니 두 시인을 다시 소환하겠다. 오늘은 이정록, 다음주는 오탁번. 오탁번 시인은 올 2월에 타계하셨다. 기댈 언덕 하나 또 허물어진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