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산악회 역사의 수다

by 김대일

손님 요구사항은 초지일관이다. 귀에 꽂은 보청기가 표 안나게 옆머리를 다듬듯이 살짝만 깎아달라는 것. 바리캉에 약간만 힘이 들어가도 훅 깎이는 수가 있어서 빗을 천천히 위로 들면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거둬 내듯 자르는 방법인 싱글링으로 대충 구색만 맞추는 선에서 작업을 마친다. 누가 봐도 이발한 티가 나는 뒷머리와는 달리 깎다 만 듯한 옆머리가 영 추레해 보여 시금털털한 감을 지울 길 없는 깎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만하면 더할 나위 없다면서 손님 요구를 충족시키는 깎새한테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수십 년째 다니는 산악회 안에서 벼슬이란 벼슬은 거의 섭렵했다는 열성 산악인께서 산악회 안에서 자행되는 남녀 간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서슴없이 까발리는 건 까다로운 요구에 부응할 줄 아는 깎새에게 보내는 일종의 답례라고 여기면 그만이겠지만 당혹스러운 건 어쩌지 못했다. 뒷꽁무니로 호박씨를 간들 귀신은 속여도 자기는 못 속인다면서 산행을 구실로 불순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남녀를 딱 보면 안다고 수다히 떠드는 그가 점점 무서워지는 건 지나친 착각이었을까.

눈이 맞은 남녀가 올라가라는 산꼭대기 대신 산아래 모텔로 새서 하산하는 시간에 맞춰 집합 장소로 합류한단다. 산행 다녀온 이들이 땀으로 후줄근해진 반면 방사를 벌이다 온 남녀는 깨끔한 티가 때깔부터 다르니 수십 년 산악인 짬밥 눈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산악회의 살아있는 역사나 다름없는 자기로서는 꼴같잖은 연애질에 산악회를 악용하는 게 괘씸하지만 그런 염문이 걸핏하면 비일비재하니 막을 엄두가 안 난다고 끝내 실토하고 말았다. 불이 이미 붙을 대로 붙어 버린 애정사에 찬물을 끼얹을 만큼 배짱 두둑한 참견쟁이는 아니라는 자백으로 들려서 그나마 수위 조절은 할 줄 아는 위인인 성싶어 다행으로 여겼다.

결론적으로 깎새를 붙잡고 요설을 휘두른 건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조차 못 느끼는 뻔뻔한 남녀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걸 낙으로 삼은 고결한 도덕주의자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수작이었다. 말문이 트이고부터 쉬지 않고 떠드는 수다에 장단을 맞춰 주면서도 민망함은 끝내 깎새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신영복 선생은 장광설長廣舌은 부끄러운 자신을 숨기는 은신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몸 담고 있는 산악회 안에서 드러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뒷담화를 한 달에 한 번 올 동 말 동 하는 동네 깎새에게 씩둑거리는 게 올바른 처신인지는 회의적이었다. 그가 곧 산악회고 산악회가 곧 그라며 스스로를 한껏 치켜세우면서 누워서 침은 왜 뱉느냐고 따져 묻고 싶어 아주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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