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빚의 연체이자율은 고약하다

by 김대일

대大, 태太, 용龍, 호虎 따위 분에 넘치는 한자를 이름자로 달고 살다간 팔자만 사나워진다면서 서울로 솔가하며 개명을 단행했던 P는 그 이후로 무탈하게 탄탄대로를 걷고 있긴 하다. 큰 대大자로도 모자라 웅숭깊은 뜻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 일一자까지 이름에 품고 사는 나로선 녀석 논리대로라면 평생 기구하게 살 팔자다. 오, 할아버지시여. 하고많은 한자들 중에서 센 글자로만 왜 작명을 하셔 가지고 맏손자를 끝도 없는 시련의 시험에 임하게 하시나이까.

서울 여의도 한 투신운용사 임원으로 근무하는 P. 아랫것들과 거하게 한 잔들 걸친 뒤 대리운전을 불러 일산 제 집으로 귀가하는 찻간에서 운전석에 앉은, 녀석의 무료함을 달래 주는 말벗이 되어 주긴커녕 묵언 일변도로 전방만 건조하게 주시하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지닌 생면부지 대리운전 기사 양반 덕분에 늦은 밤은 도대체 몇 시를 기준으로 삼을지에는 안중에 없이 한반도의 남동쪽 부산 해운대에서도 동쪽 끄트머리에서 곤히 잘 자고 있던 나를 부러 깨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개명 잘 한 덕에 대리운전 기사가 대신 운전해 주는 외제차 푹신한 뒷좌석에 눕듯이 앉아서는 이용사 자격시험만 다섯 번째 준비 중인 개명 안 해 쭉정이 신세로 전락한 친구한테 잘난 유세 떨까 비위부터 상해 아예 묵음을 해버린 적이 없지 않지만, 알콜기에 절어 적적해진 마음 전할 사람이 오죽이나 없어서 나한테까지 연락을 하나 안쓰러운 마음에 슬쩍 받으면 로얄 살루트서껀 발렌타인 30년을 짬뽕으로 섞어 처드셨는지 거들먹거리면서 살갑기도 한 특유의 묘한 톤으로 '친구야!'를 목청껏 불러제끼는 바람에 단잠이 다 달아난다. 사내들끼리는 징그러워서 잘 쓰지도 않는 '보고 싶다'란 말을 한 십 분 쉬지 않고 남발하더니 제 풀에 지쳐 전화를 뚝 끊어 버린다. 이러자고 통화 버튼을 눌렀나 후회한들 소용없다. 달아난 잠을 다시 붙잡기엔 버스 떠난 지 이미 오래니까.

한번은 내가 녀석한테 전화를 걸었었다. 못마땅한 일 때문에 혼자 낮술을 마셨고 넋두리 겸 동조의 위안이나 얻을까 싶어 녀석을 찾았던 것이다. 술은 마셨으되 심야가 아닌 대낮이었으니 결례는 아니었다. 하물며 제 놈도 거는 전활 나라고 못 거랴 오기 비슷한 것도 발동했다. 돈 다루는 회사의 임원씩이나 되니 평일 오후 나절에 걸려 오는 사적인 전화를 탐탁찮게 여길지 모른다 은근슬쩍 걱정이 됐는데 용케 받더군. 거의 사무적이나 다름없는 다정한 응대로 한 이삼 분 통화하더니 곧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며 먼저 끊으려고 했다. 그런 녀석의 음성 뒤로 '깡', '깡' 드라이버로 골프공을 쳐대는 울림이 효과음처럼 슬금슬금 들려왔다. 막 끊으려는 녀석을 저지하고 비아냥거렸다.

"야, 요즘 투신운용 이사님의 급한 용무는 실내 골프장에서 보는가벼."

P가 대답했다.

"새끼, 눈치 하나는."

P 얘기를 꺼낸 건 나한테 진 빚을 올 여름에는 녀석이 꼭 갚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고연봉을 자랑하는 금융 샐러리맨에 평수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외제차까지 모는 녀석이 뭐가 답답해서 나한테 돈을 빌리겠는가. 그러니 그 빚이 금전이 아닌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빚의 연체이자율은 적정선을 강조하는 법정이자율하고는 달리 상환을 미룰 때마다 서운한 감정과 절교의 결단이 기하급수적으로 부푸는 몹시 고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하여 나는 올 여름 녀석의 귀향을 재차 촉구하는 바이다.

일전에 우짠 일로 대낮에 멀쩡하게 연락을 한 녀석한테 단단히 오금을 박았다. 네가 부산 내려와 나를 모시고 최고급 횟집에 가서 정중하게 술 한 잔 따라주지 않는 한 절대 빚은 상환할 수 없다고. 알았다고는 하던데 영 건성으로 들려 찜찜하다. 이쯤에서 빚의 실체, 도대체 그 빚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건 다음에, To Be Continued. 혹시나 상환 의지가 안 보이거나 상환 의무에 불성실할 걸 대비해 녀석을 질타, 각성시키는 차원에서 글을 남기는 바이니 이런 나의 결연한 의지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휴가철이다. 제아무리 델타로 진화한 역병을 핑계로 둘러댄들 나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사적 모임 4인 미만은 괜찮다잖아. 지하고 나하고만 만날 낀데! 횟집? 회 사다가 바닷가 나가서 먹으면 되잖아. 널린 게 바단데! 그 머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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