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욕 유토피아

by 김대일

올 적마다 속을 벅벅 긁어대기 일쑤인 진상 손님이 볼일 다 마치고 나가는 걸 확인한 뒤 뒤통수에다 대고 깎새는 "씨발놈!"이라고 뇌까렸다. 그러고 나서 이내 후회했다. 이왕 뱉을 욕이면 더 찰져야 묵은 체증까지 씨언하게 내려가 후련해지련만, 능하지 못한 구변이 내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찌뿌드드한 기분을 단박에 날릴 동치미 국물 같이 개운한 뭔가를 갈구할 때면 깎새는 욕이란 도덕적 아웃사이더에 자꾸 기대려 한다. 하지만 동물(주로 개)이나 사람 성기를 동원한 욕은 그 치명적인 상스러움에 비해 취향에 썩 맞지 않아 일없다. 깎새가 애타게 찾아 헤매는 쌍욕이란 기발한 메타포와 출중한 리듬감, 범접하기 어려운 유머와 익살이 탑재된 문학적 상상력의 탁월한 발현이라고 한다면 이 무슨 개수작인가 싶겠지.


눈깔은 얼음에 자빠져 지랄 떠는 소 눈깔 같이 최생원의 호패 구멍 같이 똑 뚫어진 녀석이, 소리는 생고자 새끼 같이 몹시 질러 하마터면 애 떨어질 뻔하였지.(성현경, 『옛 그림과 함께 읽는 이고본 춘향전』, 열림원 에서)


욕이 적나라할수록 모욕감은 배가가 될 테니 화자 입장에서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바이겠으나 욕은 또 다른 욕을 불러 자칫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우세를 당할 소지가 다분하다. 하여 이왕 내뱉을 거면 위에 예시한 욕인 듯 욕 아닌 욕 같은 것이 어쩌면 더 효과적이지 싶다. 욕을 먹은 청자 입장에서 음미해 보자. 위 예시처럼 디스를 당했다 치면 대거리는 고사하고 우선 나열된 언어가 암시하는 의미부터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을까. 의미 파악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되니 즉각 대응이 어렵다. 그러다 보면 불끈하던 기분이 살살 달래질 수 있을 테고 혹 경우에 따라서는 불알동무 사이에 무람없는 농지거리로 착각할 듯도 싶으니 첨예하게 맞서던 긴장감이 너털웃음으로 바뀌지 말란 법이 없다. 그렇다면 청자가 제 귀를 더럽힌 게 무슨 욕인지 파악하느라 머뭇거릴 거라는 걸 그 욕을 내뱉은 화자가 의식적으로 노렸을지 모를 일이다.

적나라하지만 왠지 장쾌해서 '욕 들을 만하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수용력, 절묘한 수사와 출중한 개그감, 레고 다루듯 말조각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재기발랄함. 그것이야말로 깎새가 바라 마지않는 쌍욕 유토피아다. 그러니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재미없는 '씨발놈'을 내뱉고 나서 후회할 수밖에.

팔순이 코앞인데도 입심만은 여전한 부친한테서 주야장천 들어 귀에 못이 박힌 표현이 몇 있다. '쌔빠질 놈(혀가 빠져 죽을 녀석)', '씨상이 같기는(실없기는)', '문디 콧구녁에 마늘씨 빼먹을 놈' 따위는 순순히 양육이 안 되는 자식놈한테 퍼붓던 저주 아닌 저주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욕바가지였던 자식놈은 그것들을 밑천 삼아 더 구수하고 걸쭉한 육담에 열중한다. 일종의 조기교육이었던 셈이다.


수십 년을 천형天刑을 받은 윤락인淪落人으로 방랑하다 은척에 들러 낮잠을 자던 중에 주머니를 털린 거지가 있었다. 거지가 입에 허옇게 게거품을 물며 "문둥이 콧구멍에서 마늘을 빼 처먹을 놈들"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을 놈들"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돌아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은 거지에게도 잃어버리면 화가 날 만한 소유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콧구멍 속의 마늘, 똥구멍 속의 콩나물은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은동전'과 나란히, 가진 게 없는 사람의 정성을 뜻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성석제, 『도망자 이치도 』, 문학동네, 2007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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