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놀이

by 김대일

4자리로 된 숫자 15개를 죽 벌여 놓고서 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택할 텐가. 혹시 몰라 일러두는데 숫자를 조합하는 데 있어 심오한 기준이나 원칙 따위는 없으니 괜히 분석적이니 과학적이니 심각하게 고심할 것까진 없겠다. 그냥 난센스 퀴즈 푼다 가볍게 응하면 될 일이다.

4739 / 3636 / 2577 / 8968 / 1717 / 2424 / 8886 / 5678 / 4619 / 3445 / 2157 / 4321 / 1212 / 6226 / 5151

15개 숫자 조합에는 사주 풀이하듯 해설이 꼬리표처럼 달려 있다. ‘4739'는 '~한 사람’ 식으로. 글 마지막에 부록인 양 달아뒀다.

지금은 탈퇴한 단톡방에서 호기심 많은 몇몇이 재미 삼아 고른 걸 밝히니까 그 숫자 조합이 의미하는 풀이가 대댓글로 달렸는데 남들이 실감하는 해당 인물 이미지와 빼다박아 다들 신통방통해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한때 유명짜했던 미남 배우 류진을 닮았다는 소리를 곧잘 듣던 아무개는 학창 시절부터 플레이보이 기질이 농후했다. 서글서글한 용모에 구변까지 유창한 카사노바적 인물은 숱한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면서도 대외적으로 착실한 이미지를 세탁해내는 교활함으로 해서 표리부동의 전형을 보여 줬지만 과거를 뒤로 하고 지금은 자기를 똑 닮은 아들 낳아 커리어우먼 와이프와 서울에서 떵떵거리고 잘사는 중이다. 그 녀석이 고른 숫자 조합 풀이라는 것이 ‘끼가 많고, 열정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반백살이 넘어서도 정염을 누르지 못하는 열정은 여전한 걸까. 사람 성정은 쉽게 안 변하는가.

다른 사례는 학창 시절부터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꼿꼿한 기질로 정평이 났으되 융통성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지금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제법 이름값하는 엔지니어로 지내는데 만날 기회가 생겨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휠 줄 모르는(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지식함은 여전해 술맛이 영 나지 않았다. 그 인물에게 돌아간 풀이는 ‘일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이쯤 되면 웃고 넘길 계제가 아니다.

당사자 입장에서야 허무맹랑하다 무시하면 그만이겠으나 소싯적부터 이어져 온 행상머리, 습관, 대인관계, 이 모든 것들이 빚어내는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꿰고 있는 주변인이라면 가공할 만한 싱크로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란 반성이라는 걸 할 줄 아는 동물이라서 어제와 오늘이 같다고 해서 오늘과 내일까지 같으라는 법은 없다. 사람은 듣고 보고 만지는 모든 것들을 종합해 이전과는 다른 극적인 변화 혹은 진화를 이룰 능력이 잠재한 덕에 고인물에 머물지 않는다. 자기반성은 필연적으로 재고의 여지라는 덤을 얻게 된다. 그러니 주변인이 단정한 그에 관한 평가는 과거 인식틀에서 비롯된 바 경험적 오류로써 치명적일 공산이 크다. 자칫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낭설이 학설이 되어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더 공고하게 다지는 어리석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그야말로 웃자며 즐기다가 죽자고 터지는 식이다.

첫사랑 마누라와 결혼까지 골인해 아직도 알콩달콩해하는 아무개가 택한 숫자 조합 풀이는 '원나잇이 있었던 사람'이다. 숫자 조합 풀이놀이에 최종적으로 불신의 낙인을 찍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게 사람의 생래적 습성인 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이 그냥 나올 리 없다. 혹시… 아 몰라.


​4739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

3636 일탈을 갈망하는 사람

2577 큰 일 할 사람

8968 일을 매우 잘 하는 사람

1717 끼가 많고, 열정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

2424 매우 감정적인 사람

8886 일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진 사람

5678 성실한 사람

4619 매우 교양 있는 사람

3445 의리 있는 사람

2157 매우 바람기 있는 사람

4321 불륜을 갈망하는 사람

1212 원나잇이 있었던 사람

6226 이성을 매료시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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