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와 막내딸 생일 즈음해 축하금으로 선물을 퉁쳤다고 어제 밝혔지만 미진한 구석이 남아 덧붙인다.
선물을 돈으로 오역하는 속물일지언정 한때는 감수성이 넘치도록 풍부했더랬다. 주고받은 생일 선물이 품고 있을 내밀한 의미에 가슴설레던 낭만은 청춘의 전유물이었다. 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선물이 뭐였냐고 물으면 망설임없이 LP라고 대답하겠다. 대학 시절 첫사랑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LP는 파내지 않고서는 끝내 관 속으로 함께 묻혀질 추억이다.
조지 윈스턴 음악은 가뜩이나 예민했던 사춘기를 보내던 남자애한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인 까닭에 그의 음악엔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배여 있었고 피아노 선율은 자연을 닮은 서정성으로 세상 모르던 아이로 하여금 구원이라는 단어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니 조지 윈스턴 앨범을 곧잘 사 모았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입시 준비로 멀어졌던 조지 윈스턴과 새삼 조우하게 된 건 대학 2학년이던 1992년 생일을 맞아서였다. 연애란 걸 하다 보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아기자기하게 노닥거렸을 테지만 조지 윈스턴이 화제의 중심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December> LP를 생일 선물로 건넸다. 생일 선물로 LP를 받았다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말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읽어내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기꺼움에 더 벅차서 그녀를 꼬옥 껴안아준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조지 윈스턴 LP가 내 젊은 한때를 수놓았었다.
그 여자와는 딱 2년 사랑했었다. 2년 동안 생일 선물을 두 번 받았는데 두 번째 받았던 게 조지 윈스턴 LP이고 처음 받았던 것도 LP였다. 록밴드인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란 노래가 삽입되어 있던 MIX 앨범. 하필 그 노래가 타이틀인 LP를 왜 선물로 줬는지 짧은 영어로 노랫말을 해석하려고 밤새 영어사전(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을 뒤지며 설레던 그때야말로 청춘이 아름답던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헤어져야 할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영원히 빠지지 않을 대못을 심장에 깊숙이 박고 훌쩍 떠나 버린 모진 사람이었으되 노래 제목따나 말 그 이상을 심어준 사람. 한때는 사람(여자)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다가 그 증오가 타고 남은 자리에 그리움이 움텄으며 그런 감정들이 뒤섞이고 변주되어 마침내 복잡다단하지만 편협하지 않을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가능성의 지평을 넓힌 계기가 되어 준 사람. 그러고 보면 실연도 사랑만큼 '사람다움'을 배양하는 값진 요소일 수도 있겠다.
이봉호라고 하는 대중문화평론가가 한 일간지 칼럼에서 자신의 음반(LP) 모으기 개인사를 피력했다. 『음악을 읽다』란 책 저자이기도 한 그는 음반을 모으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었다. 세상이 변하니 음반 수집가들은 아나로그를 버리고 디지털을 선택했다. 구수한 LP를 포기하고 CD, 파일, 인터넷, 유투브 따위에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참회했다. 음악을 실물 형태로 간직하던 세대로서 아날로그(LP)가 뿜어내는 아로마 향기를 왜 외면했는지 후회했다. 생활에 불편하다고 한옥의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 없듯 LP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는 소중한 사실을 진즉에 몰랐나 하는 후회 말이다.
칼럼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음악을 과하게 좋아하다 보니, 관련한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버지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우리 곁에는 취향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비록 밥도 쌀도 아니겠지만.(이봉호, <타인의 취향>, 경향신문, 2017. 03.30 에서)
대학생일 무렵 생일 선물로 받은 LP가 내게 그런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