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푸네 밥상>은 핀란드 세 청년의 한식 배우기 담은 TV 프로그램이다. 각자 요리할 한식 메뉴를 정해 요리법을 습득해 가는 과정이 대견하면서 재밌다. 한식을 배우자니 한국어도 알아야 해서 그들은 우리말 익히기에도 여념이 없다. 그들 중 빌레라는 청년의 한국어 습득 방법은 특히 내 눈길을 끌었다.
일단 한국어를 한글로 쓴 뒤 영문자로 발음 기호처럼 써서 소리를 따라하고 그 의미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예를 들자면 '옵니다'란 낱말을 한글로 쓴 뒤 영문자로 발음을 표시하면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행위를 그림으로 그려 넣는다. '갑니다'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만 다르다. 모양(한글), 소리(발음), 의미(그림)를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익히니 참으로 신박한 공부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말 익히기를 시도하는 족족 중도에 포기하고 만 내 입장에서 빌레의 한국어 공부법은 자극 그 자체였다. 책을 읽거나 대화 중에 흥미를 자아내는 낱말이나 관용구, 속담은 메모를 해 둔다. 그러고 공책에다 일일이 적어서 정리를 하긴 하는데 쟁여만 두고 써먹을 줄 모르는 게 큰 문제다. 그때그때 적절하게 활용할 요량이지만 막상 무엇을 갖다 써야 할지 전혀 기억이 안 나 끌탕만 하다 무위로 돌아간 적이 숱하다. 이는 내 공부법이 별로 실용적이지 않아서겠다.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것들을 떠올리는 데 필요한 연결 고리가 전혀 없다. 빌레의 그림 같은. 그러니 암만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혀 궁리를 안 한 건 또 아니다. 낱말의 뜻을 풀어 놓고선 그 낱말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키워드를 따로 체크해 둔다거나, 비슷한 뜻을 가진 것들끼리 묶어 놓고 그 대표격으로 일상적으르 흔히 쓰는 것을 앞세워 외우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면, '우물고누 첫수'라는 표현은 1) 상대편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가장 좋은 대책, 2) 다른 변통은 할 재주가 없는 사람이 쓰는 유일한 수단을 비유 라는 뜻이라고 하면 1) 내용 중 '가장 좋은 대책'을, 2)에서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키워드로 '우물고누 첫수'라는 표현을 연상한다. 또 '미욱하다', '용통하다', '데퉁궂다', '열퉁적다', '별미없다', '변모없다'는 주로 사람 됨됨이에 관한 부정적인 표현으로 한데 묶어 '어리석다', '거칠다', '미련하다'라는 흔히 쓰는 낱말을 대표격으로 표시해 둔다.
허나 이는 내 기억력의 한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무리수여서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자초했다. 마음 동하면 끄적이다 중간에 막살하고 또 끄적이다 막살하는 무한 반복 탓에 애꿎은 공책만 여러 수십 권 버렸다. 근데 어제 또 문방구 가서 스케치북 형식의 위로 넘기는 노트를 세 권이나 샀다. 빌레의 연상법을 따라할 작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빌레처럼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작자가 뭔 수로 빌레를 따라한다는 건지. 이러다간 미술학원 가서 그림 그리는 법을 따로 배우려고 덤빌지 모른다. 달리 점입가경이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이 짓을 결코 그만두지 않을 테다. 왜냐고?
말이나 행동 따위가 매우 거만하고 앙큼한 데가 있으면 '아기똥하다'로, 시치미를 떼고 모르는 척하면 '아닌 보살 하다'로, 서로 제 말이 맞다고 우기니까 제 삼자를 앞에 두고 전에 한 말을 되풀이해 누구 말이 옳고 그른지 따지는 걸 '무릎맞춤'으로 바꿔 쓰는 재미를 어찌 쉽게 버리겠는가.
특유의 해학과 풍자의 멋과 맛 거기다 리듬감까지 우리말은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마력을 지녔다. 의사소통에 최적화된 말은 언중들에게 편리성을 부여했을지 모르겠으나 자칫 상투적이어서 진부해질 수 있다. 이는 언어의 생명력을 갉아먹을 소지가 다분하다. 기왕 똑같은 의미라면 나는 보다 다양하게 표현하고픈 욕구가 강하다. 특히 순우리말로 말이다. 그리만 할 수 있다면 내 언어 생활은 물론 지적 수준도 지금보다는 확장되지 않을까.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을 철석같이 믿으며.
결론으로 똑같은 얘기 또 하지만, 주옥같은 우리말을 머릿속에 제대로 담지 못하는 내 미숙한 학습력과 아둔한 기억력이 그저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