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고려

by 김대일

KBS 대하드라마는 퓨전사극과는 궤를 달리하는 정통 사극이다. 정사를 바탕으로 고증도 철저한 편이다. 물론 방영됐던 모든 작품이 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2008년 <대왕 세종>은 형식, 고증 면에서 파격적이었으나 그로 인해 흥행은 부진했다)

KBS 대하드라마가 <고려거란전쟁>이란 작품으로 새롭게 발진했다. 고려와 거란 간 제2차, 제3차 전쟁을 다룬단다. 거란의 야욕을 귀주대첩으로 분쇄한 강감찬 장군이 주인공으로 작품을 이끌 건 자명하다. 스펙터클한 전쟁 장면으로 시청률을 기대하자면 제2차, 제3차 전쟁이 제격이긴 하지만 서희로 대표되는 제1차 전쟁이 나는 더 흥미롭다. 논리적이고 담대한 세 치 혀로 전쟁을 종식시킨 특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거란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항복을 종용했다. 큰 충격에 빠진 고려 조정은 화친론자와 주전론자로 나누어진다. 화친론자는 할지론자라고도 하는데 서경(평양) 이북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주장을 했다. 이때 서희가 거란이 전쟁을 일으킨 의도가 뭔지 일단 알고 난 다음에 항복을 하든 싸우든 결단을 내자고 주장했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는 중에 고려와 송나라 관계를 단절시키고 거란과 교류하려는 목적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간파했고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고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대신 두 나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선결해야 할 문제를 역으로 제시했다. 고려에서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일대를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어 고려 사신이 거란으로 가는 데 지장이 있으므로 이 지역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거란이 이를 수락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강동6주'를 얻는 개가를 올린다.

이쯤에서 끝내면 밋밋하다. 고려사 연구 한길을 걸어온 역사학자 박종기가 쓴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푸른역사,2008)에는 서희 담판 이후 고려가 펼친 깨물어 주고 싶을 만치 영악한 실리 외교를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 이때 고려가 송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방식도 아주 흥미 있습니다.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입 사실을 통보하면서 원병을 요청합니다. 송나라에서 군사를 파견해줄 리가 없겠죠? 고려는 이를 이유로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합니다. 결국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의 외교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강동 6주 지역을 얻는 영토의 실리를 얻습니다. 고려 실리외교의 한 전형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원병 요청은 제 앞가림 하기에도 벅찬 송한테 보내는 결별의 미끼인 셈이다. 거란이 치근대는데 큰형이 손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그럴 여유 없다고? 알았어. 그럼 나도 내 살 길 찾아볼 테니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깔끔하고 영리한 결별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이후에라도 꼬투리 잡힐 게 없는 고려의 대송 외교는 요즘 시쳇말로 완전 쩐다!

조선에만 지나치게 천착하다 역사를 보는 시각이 협소해지는 경향이 있다.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는 고려를 '다원성과 통일성이 돋보이는 사회', '개방과 실리를 중요시한 외교', '투박함과 화려함이 공존한 문화', '어느 시대보다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삶을 산 사람들'로 간략하면서도 명료하게 평가한다.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실리적 태도, 고려가요로 대변되는 자유로움과 솔직함으로 무장한 고려가 박제화된 역사를 찢고 다가온다. 고려를 배경으로 한 대하드라마가 등장하자 고려를 파고들고 싶은 욕구가 새삼스레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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