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연성을 담보한 허구라면 일단 황당무계하진 않을 터. 글맛은 천부적 재능일지 몰라도 글감까지 싸들고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는 나는 이발소라는 텃밭에서 움이 튼 에피소드들을 살뜰하게 키우는 재미로 산다. 그것들이 무르익어 가을걷이하듯 수확할 즐거움을 꿈꾸면서.
부산 원도심 한 동네라고 해두자. 비탈이 약간 진 그 동네 이발소로 가자면 가까운 전철역에서 내려 도보로 10분 이상, 버스로 갈아타면 두 정거장은 족히 가야 하는 수고로움이 든다.
<덕궁德宮 이발소>
촌스러운 이름을 단 점방은 '덕이 무궁무진한 궁궐같은 이발소'라는 뜻이지만 거기서 이발을 했대서 덕이 극에 달하는 행운을 누릴지 아니면 있는 덕까지 탈탈 털려서 나올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점방 주인은 김씨. 50대 중반인 사내로 점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다 보니 가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동네 토박이도 아닌지라 김씨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야기 주인공과 배경은 오래전부터 구상했지만 더 진척되진 않아 딱 여기까지다.
이발소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오쿠다 히데오의 『무코다 이발소』(김난주 옮김, 북로드, 2017)가 당장 떠오른다. 아류가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이 좌충우돌하는 유쾌한 소동극인 김호연의 『망원동 브라더스』(나무옆의자, 2013)를 빼놓으면 또 섭섭하다. 그보다는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대원씨아이, 2008)을 닮고 싶다는 게 솔직한 속내다. 『심야식당』처럼 다양한 인간군상을 등장시켜 그들의 희노애락을 담담하고도 슴슴하게 그려내고 싶다. 거기다가 양념 격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식 트릭과 가슴뭉클한 반전 따위를 집어넣어 소소한 재미까지 더하면 금상첨화겠는데, 쩝.
상상력 부재는 타고났으니 떠오르는 영감이 창의적일 리 없다. 유일한 밑천이라고는 장삼이사 손님들이 너저분하게 떠들고 간 수다들 중에 이야깃거리가 되겠다 싶어 잽싸게 써제끼고 본 메모 수백 개가 전부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사람을 든든하게 만든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넉넉해지는 글감을 보면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인 양 풍요롭다.
'언제 쓸 것인가'라고 물어보면 대답이 궁하다. 아침에 쓴 글을 저녁에 읽어 보면 몹시 부끄럽다. 글발은 역시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거라서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매일 조석으로 죽자사자 끼적댔는데도 글맛은 여전히 안 살아 참 답답하다. 그러니 언제 착수할지 요원하다. 그저 언젠가 집필할 그날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살 뿐이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