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다. 집까지 걸어가기 아찔해 전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실망스럽게도 버스 안은 냉랭했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못한 기사 때문인지 히터가 시원찮아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느닷없이 한 아줌마가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추운 날 틀라고 있는 기 히터 아이요?"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데자뷰. 그렇다. 시간이 제법 흘렀어도 구실 잡은 기억은 기어이 그때 그 장면을 다시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하기사 어찌 잊겠는가 그때 강렬함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 2018년은 유난히 추웠다. 한강은 전해보다 42일, 평년보다 29일 빠르게 결빙됐고 수도관은 물론이고 세탁기에 변기까지 얼어 터지는 동파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고 어이없어하는 세간의 푸념이 위쪽 지방에서는 자자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자랑하는 부산이지만 그해 1월만은 바짝 얼어 있을 때가 잦았다. 특히 1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는 평균 기온 영하 5도를 밑도는 혹한이 거푸 이어져 따뜻한 남쪽 사람들까지 멘붕이 왔다. 비웃지들 마시라. 수은주가 영하 5도에서 움직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날이 며칠째 이어지는 부산이라면 시베리아 동토만큼이나 엄혹하다는 건 안 겪어본 사람은 잘 모르니까.
히키코모리를 자처하던 한 친구를 으르고 달래 방구석에서 몰아내 동래 전철역 근처에서 만난 날은 하필이면 1월 기온으로는 제일 추운 날이었다. 저녁 식사 겸 반주로 한 잔, 맥주집에서 입가심으로 막잔을 걸친 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 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어중간한 밤이었다.
바깥하고 비교할 바는 아니어도 독한 냉기가 버스 안에 음침하게 똬리를 틀어 몇 명 안 되는 승객들은 한껏 옹송그린 채 어서 빨리 목적지에 닿기만을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을 에는 추위에 히터를 안 틀고 버스를 모는 무모한 기사는 없다. 다만 작동하는 즉시 온기를 체감할 고성능 히터를 탑재한 버스를 모느냐 아니냐는 기사의 재량권 밖이다. 그러니 장담한다. 그날 시내버스를 몰던 기사는 분명히 히터를 틀고 버스를 운행했으며 그게 진실이라는 데 내 오른팔과 전 재산을 건다고. 앉았던 좌석 밑으로 쥐좆만한 온기일지언정 분명히 느껴졌기에.
나는 얌전한데다 조용한 편이다. 버스를 타면 으레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 볼륨을 키워 주변 소음騷音을 소음消音하곤 한다. 소리의 장막으로 소리를 막는 방법은 의외로 효과가 커 입이 재 끊임없이 떠들거나 화통을 삶아 먹은 듯이 왜장치는 승객의 방해를 어느 정도는 차단해 자기만의 고요에 수굿이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한 법이 없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어대듯이 새된 목소리가 공고하게 구축되었다고 자신만만했던 소리의 장막을 무력화시키고 고막을 파고들 때는 별무소용이었으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고요를 박살낸 목소리와 버스 안에서 일대 격전을 벌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진격의 파이터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버스 탄 지 30분쯤 지났을 무렵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튀어나오기 전까지 전혀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었다.
“아저씨, 히타 틀었으요?”
점잖게 생긴 기사가 모기소리만큼 대꾸를 했지만 파이터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는 실패했음을 연약한 먹잇감을 노려보는 야수 표정을 한 파이터 얼굴만 봐도 딱 알 수 있었다. 몇 분 간 무거운 침묵이 더 흐른 뒤 나이 지긋한 노인이 그야말로 갑자기 툭 튀어나와 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이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파이터가 촉발한 버스 안 긴장감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가는 선도요원이자 전화戰禍의 불길을 당긴 불쏘시개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신스틸러가 아닐 수 없겠다. 기사 바로 옆까지 진출한 노인은 버스 안이 춥다고 항의를 했고 기사는 억울했는지 버스까지 정차시키고는 내가 앉은 자리로 노인을 데려가 그 밑에 설치되어 있던 팬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게 했다. 히터가 시원찮아 온기가 더디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아저씨, 솔직히 내가 물어보기 전까지 히타 안 틀었잖아요? 왜 거짓말해요?”
예상치 못한 파이터 공격에 움찔했는지 기사가 우물쭈물했다. 왜소한 체구에 순둥이 얼굴을 한 기사가 감당하기에는 버스 안은 추위로 이성을 잃은 야수들로 점점 흉흉해졌다. 지탄의 대상이 된 기사가 과연 온전하게 버스를 운행할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들던 나는 기계 결함을 사람의 태만으로 몰고 가는 파이터 어깃장이 영 꼴같잖아 전혀 나답지 않게 전투적으로 변했다. 꼭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으로 낙하산을 타고 투입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공수부대원 같다고나 할까. 전작前酌에 기댄 측면이 없지 않아 대단히 무모했었지만.
“아주머니, 기사 아저씨는 내내 히터 틀고 왔어요. 제 발 밑에서 팬이 계속 돌았거든요.”
“젊은 사람이 뭘 안다고 끼어들어요? 히타를 틀었다면 30분이 넘도록 내 발이 시린 이유가 뭐냔 말이야. 이 엄동설한에 나만사람은 버스를 어떻게 타라고 히타도 안 틀어? 그라고 참 이상하네. 그짝은 눈치없이 끼어들어 와 기사 양반 편을 드는 거요?”
“아주머니, 기사 아저씨 편드는 게 아니라 히터가 작동이 되는데도 안 틀었다고 아주머니가 하도 억지를 부리니까 중재하려는 건데 소리 지를 것까지야 없잖아요?”
“어디서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눈을 부라리고 대들어. 내가 춥다면 추운 거지 뭔 말이 그리 많아!”
버스 안에서 벌어진 쟁투로 설핏 남은 술기운까지 싹 가셨고 잠시 가출한 정신은 원래 자리로 급히 되돌아왔다. 그제서야 상황을 직시하게 되자 상대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감히 아줌마한테 대들어 대들긴. 쏘아 놓은 살이요 엎질러진 물이로되 꼬리 내린 꼴로는 영 모양이 빠지는지라 최대한 능글맞게 처신하면서 내빼는 출구 전략을 세웠는디.
“낼모레면 오십인 사람한테 젊은 놈이라고 해주니까 기분은 참 좋네요. 근데요, 히터 계속 틀고 왔거든요 아줌마!”
뒷덜미로 말폭탄이 우레처럼 펑펑 터지지만 나 몰라라 했다.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올리고 아줌마 쪽으로는 눈도 안 돌렸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자체 최면을 걸었다. 고지(내릴 정류소)가 코앞이니 그때까지만 꾹 참자며.
내리려는 정류소 바로 앞 정류소에서 파이터가 갑자기, 먼저 내렸다. 허를 찔린 듯 황망했다. 당시 그 버스 노선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기에 난감했다. 집앞이 갑자기 지뢰밭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