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사연

by 김대일

퇴근길에 듣는 라디오 프로에서 어떤 사연이 소개됐는데 사연 속 주인공이 아는 사람과 흡사했다. 자동차회사에서 30년 근속하다 정년 퇴직하고 1년 전부터 남성 커트점을 열어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다는 남편을 자랑하는 아내 사연이었다. 퇴직하기 전부터 이용학원을 드나들면서 기술을 익혀 점방을 열기까지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을 테지만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보람차게 사는 남편이 대단하다고 상찬을 늘어놓았다.

3년 전 깎새가 이용학원에 막 들어섰을 때 자격증은 이미 땄지만 실무 기술이 안 늘어 마음앓이가 심하던 최 선생은 라디오 사연 속 주인공과 빼다박았다. 당시 그도 완성차를 생산하는 대기업에서 30년 근속과 퇴직을 앞두고 있었고 점방 하나 차려 여생을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은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9월 양산시 부근에 자그마한 점방을 차려 운영 중이다. 자격증은 늦게 땄는데 오히려 점방은 빨리 연 깎새한테 두유 한 박스 들고 찾아와 개업 관련해 이모저모 물어보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년이나 지났다. 갑자기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막 일었다. 사연 속 남편이 최 선생이 맞는지.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조직생활에 이골이 났는지 사람을 상대하는 데 능글맞은 최 선생은 모든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듯해도 사람을 가리는 편이었다. 입맛대로 내 편, 네 편을 갈라 온도차를 두는 품이 교묘했다. 최 선생한테 깎새는 내 편이 아니고 네 편임을 진작에 눈치챘었다. 동문수학할 때부터 최 선생은 다가가기 좀 어려운 상대였다. 남의 말을 늘 경청하는 성싶다가도 자기가 이미 정한 가이드라인을 끝내 고수하고 마는 최 선생 고집은 완강했고 유난스러웠다. 근데 어이없게도 마음 통한 동료가 훈수를 두면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양 '유레카!'를 외치는 이중성은 깎새로 하여금 최 선생에 대한 마음의 빗장을 더 굳게 걸어 잠구게 했다. ​작년 9월에 두유 들고 깎새를 일부러 찾아왔을 때도 동업자 정신에 입각한 유대감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점방 개업을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인한 바라고 깎새는 단정할 수밖에 없었고.

예상은 했지만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딱 안다. 건조하지 않은 것만으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라디오 사연이 최 선생과 흡사해 맞는지 확인한다는 핑계로 겸사겸사 연락을 했다는 깎새한테 집에 가서 아내한테 물어보겠노라며 "장사는 궤도에 올라섰지요?" 되물었다. 죽지 못해 산다고 앓는소리를 했더니 이 바닥은 기다림의 연속인 것 같다며 달관한 사람인 양 굴었다. 깎새 귀에는 만만찮다는 넋두리로 들렸지만. 그럴 만도 할 거이다. 3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함께 실무 기술을 익혔지만 최 선생은 늘 답보상태였다. 나이 60줄에 새로운 걸 익히는 게 쉽지 않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최 선생 고집이 좀더 나은 기술적 모색을 방해하는 걸림돌임이 분명했다. 손님 구미에 맞는 현장 기술로 거듭나려면 꽤나 길고 험난한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게다. 문제는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최 선생이 버텨내느냐인데 이발 기술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절박한 판단이 든다면 교활하게도 태세를 전환할 것이다. 그것이 언제쯤일지는 본인만이 알 뿐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 소개가 그 속사정일랑 아랑곳않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신기했다. 아내한테는 더없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 남편 속은 숯검뎅이가 되어 있을지 누가 알랴. 그러니 라디오에 사연을 소개하는 것도 주의해서 보낼 일이다. 최 선생의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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