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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04. 2023

어떤 인연(1)

   피천득은 <인연>이라는 수필을 이렇게 끝맺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수필처럼 애틋하진 않아도 비슷한 인연은 있다. 피천득은 세 번을 만난 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지만 세 번째 만남이 이뤄지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재회의 사다리를 걷어찼다. 그제 올린 <nunc est bibendum!>이란 글에 등장한 옛 배경이 그 인연이다. 사연을 꺼내면 길어지고 긴데다 알맹이까지 별로 실하지 못해 언급을 안 했지만 옛날 인연을 곰곰이 더듬어 보자니 뉘우쳐지는 뭔가가 송곳인 양 가슴을 콕콕 찔러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단숨에 쓰기엔 기억의 파편이 산재해 있다. 일일이 찾아 끼워 맞추자니 호흡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얘기를 끊어 나눠 쓰는 까닭이겠다. 이해하시길.


​   #1. 1988년 5월 어느 봄날

   도시 속 작은 절은 한산했고 남향인 대웅전은 봄볕으로 따스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법회가 열리지만 고1 소년이 그보다 일찍 절을 찾은 까닭이었다. 따스한 봄기운과 기묘하게 어우러진 고적함을 소년은 무척이나 즐겼다. 대웅전 한쪽에 자리를 잡아 방석을 깔고 앉아서 불상만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던 소년 옆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소녀였다. 

   불교반은 남녀고등학교가 연합해 결성되었다. 신입생인 소년과 소녀가 3기였으니 오래되진 않았으나 토요일마다 법회를 빠짐없이 여는 불심 두터운 동아리였음은 틀림없었다. 입학과 동시에 동아리에 가입한 소년과 달리 소녀는 한두 달 늦게 동아리에 나타났다. 등장은 늦었으되 깜찍하고 생기발랄한 면모로 남자 선배와 동기들 관심을 한몸에 받았더랬다.

   낯을 가리는 편인 소년은 다가서는 소녀가 어색했다. 소년 옆에 앉은 소녀가 마치 오래 사귄 사이처럼 친근하게 굴었고 경계했던 처음과는 달리 소년도 차츰 소녀 얼굴을 바로 보게 됐다. 돌이켜보면 참 의아한 건 그때서야 비로소 말문이 트였음에도 소녀는 불행한 자기 가정사를 무심한 척 주워섬겼다는 점이다. 친모의 때이른 죽음, 상실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가한 친부에 대한 원망, 계모와의 불화 따위. 소녀가 늘어놓는 넋두리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을 성싶은 소녀를 감싸 주고 싶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어느새 눈망울까지 젖어 버린 소녀를 보면서 언제까지고 꼭 소녀 곁을 지키겠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한 소년.

   그때 당시 소녀를 떠올리면 의아했던 건 또 있다. 소녀는 마치 소년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어떤 시인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 무렵 소년은 바이런이라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So, we'll go no more a roving>는 늘 읊조리고 다니던 애송시였다. 대웅전 만남 이후 한두 주쯤 지났을까. 소녀는 소년한테 책 한 권을 건넸다. 자기네 집에 있던 문고판 바이런 시집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일기를 시집에 쓰는 버릇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이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란 시를 읽으려고 시집을 펼쳤을 때 그 페이지 여백에 연필로 쓴 손글씨가 몇 줄 쓰여져 있었다. 아마 소녀가 말한 일기를 쓴 흔적이었으리라. 오래된 일이라 내용은 전혀 알 길이 없으나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막힌 우연. 소년은 감당하기 벅찬 설렘에 며칠 밤잠을 설쳤더랬다. 소년과 소녀는 도시 속 작은 절, 봄볕 찬란했던 대웅전, 그리고 바이런이라는 매개물로 이어진 소중한 인연이었다. 섣불렀지만 소년은 그런 소녀를 연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녀한테 느끼던 지고지순한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소년은 소녀한테 'dirty!'라고 쏘아붙였다. 그해 연말이었다.


​   #2. 그해 연말

   불교반 같은 기수끼리 모여 쫑파티를 하던 자리였다. (이하는 다음 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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