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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05. 2023

어떤 인연(2)

   #2. 그해 연말

   1학년 내내 불교반 남학생들 사이에선 소녀 남자친구를 자처해 과시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유행인 양 자주 연출되었다. 오죽했으면 왜 진짜 남자친구인지 증명하려고 자기네들끼리 모여 갑론을박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질 지경이었다. 소년도 남자친구라 자부는 했지만 나서서 들먹이자니 쑥스러운데다 마치 암컷 하나를 두고 수컷들끼리 으르렁거리는 듯한 모양새가 경박하고 유치해 보여서 거리를 뒀다. 하지만 그들이 제가끔 남자친구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소녀의 처신은 영 마뜩잖았다. 불행한 가정사를 모르는 치가 없었고 하나같이 소녀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것.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애써 담담해했지만 사내를 바꿔 사귄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자 소년 역시 소녀 주변을 얼쩡거리는 수컷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 앞에 끝내 맞닥뜨리고 만다. 소년은 난생처음 농락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치만 봄볕 찬란했던, 대웅전에서 함께 속삭이던 오후 한때가, 내밀한 일기가 적힌 바이런 시집이 여운으로 남아 소년을 내내 괴롭혔다. 그때 소년은 너무 어렸고 여렸다.

   한 해가 저물던 연말 즈음이었다. 토요일 법회를 마치고 같은 기수끼리 연말 쫑파티를 벌이던 자리였다. 돌아가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며 동기들에게 덕담을 건네던 중에 소년 차례가 되자 소녀를 똑바로 쳐다보곤 "dirty!"라고 토해냈다. 안 보면 그립다가도 막상 보면 사무치게 미워지던 소녀에 대한 원망이었다. 충동적이었으되 파국이었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소녀는 이후로 두문불출했다.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졸업을 했고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   #3. 실수, 그리고 의도된 절연

   불교반 후배가 늦은 장가를 갔을 무렵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뒤풀이 장소에서 소년은 소녀와 재회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20년을 훌쩍 넘긴 어느날이었다. 소녀는 예의 깜찍하고 발랄한 면모로 하객들 사이에서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데면데면해하는 소년과 달리 소녀는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한껏 드러냈다. 옛날 일은 까마득히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을 대하는 소녀였지만 소년은 거북살스러웠다.

   '여전하군.'

   불현듯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고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듯한 소녀의 위선에 소년은 반가움 대신 경멸과 불쾌감이 일었다. 하지만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돌발적인 언사로 경사스러운 날을 파탄낼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였고. 뒤풀이가 끝날 즈음 소녀는 소년 연락처를 모른다며 자기 연락처를 천연덕스럽게 건넸다. 잠시 망설이던 소년도 연락처를 건넸다. 피차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당시 소년은 파산 직전이었다. 뒤웅박 신세로 전락하자 빚잔치하느라 늘 치여 살았다. 돈 나올 구멍이 더는 없자 지인들한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사람 좋다는 소리는 막된 놈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장된 지인 전화번호를 뒤지는 게 일상이 되어 버린 소년 눈에 소녀 연락처가 들어왔다. 하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녀한테만은 망가진 꼴을 드러내기가 싫어서였다. 또 꼴사나운 짓으로 비참해지긴 싫다는 오기랄까. 

   소녀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쭈볏거리던 소년은 급전이 필요하다고 용무를 밝혔다. 몇 초가 몇 시간 같은 침묵이 흘렀고 줄 돈도 없지만 있어도 배우자가 될 남자와 상의해야 해서 어렵겠다고 소녀는 거절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소년은 마침내 안도했다. 이로써 업보 같은 인연을 끊을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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