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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08. 2023

아빠, 사회부조 수혜금이 뭐야

   막내딸은 요즘 기말고사 치르느라 전전긍긍한다. 펜싱 그만두고 일반고로 전학을 간 뒤 처음 맞는 시험. 현저한 수준차를 부인할 수는 없어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자는 게 이번 기말시험에 바라는 바다. 어쨌든 책상머리에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하는 시늉 내는 것만도 가상하다. 하지만 중2 이후로 거의 손을 떼다시피한지라 기본이라는 게 워낙 부실하다 보니 쉽사리 진도를 빼지 못하니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아비는 제 일인 양 안타깝다. 특히 교과서 지문 속 생소한 용어와 맞닥뜨리기라도 할라치면 그대로 가리산지리산한다. 도통 모르겠는데 그냥 넘어가면 다음 내용까지 기약할 길 없어 끝내 답답하면 아비한테 쪼르르 달려온다. 그제 저녁도 그랬다.

   "아빠, 사회부조 수혜금이 뭐야?"

   담임이 다른 과목은 어쩌지 못해도 사회 과목만은 신경을 써서 준비하라고 당부를 해서인지 막내딸은 유독 전의를 불태웠다. 그럼에도 알쏭달쏭한 용어들이 진을 친 교과서 앞에서 영 재미를 못 느끼는 눈치였다. 퍼뜩 떠오른 데자뷔. 비스무리한 장면이 전에도 연출되었었지. 막내딸이 중2였을 때지 아마. 2학기 중간고사 준비하던 중에 국어책을 들고 마찬가지로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왔었다. 

   당시 막내딸은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었다. 1학기 기말시험을 통째로 망쳐 엄마를 대환장시킨 전적을 만회하려고 독서실을 끊는다 어쩐다 제딴에는 애를 쓰는 눈치였다. 당시 펜싱에 온통 마음이 뺏긴 녀석한테 호성적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엄하게 훈육하는 어미 대신 즐기라고 부탁을 했다. 성적이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나쁘다고 기 죽을 거 없다고. 단, 안 하고 후회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점만은 유념시켰다. 

   시만 나왔다 하면 괴롭댔다. 쉽진 않겠지만 시 자체를 즐기라고 당부했다. 교과서를 불쑥 내미는데 아비도 처음 보는 시였다.


​먼 후일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똥줄이 타는 막내딸한테는 미안했지만 첫사랑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못 잊는 얼굴이다. 살짝 나간 정신을 원상태로 돌린 뒤 아는 대로 시를 해석하려 들었다. 물론 엄마가 알면 어퍼컷 한 방이 날아올 게 뻔한 첫사랑 타령은 쏙 빼고.

   애써 잊었다고 강변하는 건 도저히 못 잊겠다고 실토하는 거와 다를 바 없다는 둥 내 맘과는 정반대로 말하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의 이상한 속성이라는 둥 속 따로 겉 따로 해야 진짜 속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둥 이른바 반어의 미학에 대해 아는 대로 씩둑거렸다. 어, 근데 반응이 바로 왔다!

   "맞아! 교과서에 반어법이라고 적혀 있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네."

   '사회부조 수혜금'이 뭐냐고 불쑥 물어오면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정부로부터 받는 급여'라는 의미를 질문자 눈높이에 맞춰 쉽고도 이해 빠르게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앱을 열어 사전적 의미를 뒤진다거나 암만 쳐다봐도 영 안 와닿으면 백과사전까지 기웃거리느라 대답이 재깍 튀어나오는 일은 드물다. 

   막내딸이 궁금해서 물어오는 용어들은 거진 '사회부조 수혜금' 같더라.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하려면 본래 뜻을 머릿속에서 입력해 한번 더 가공해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낱말을 끼워 맞춰 설명하면 이해의 폭은 훨씬 넓어질 테지만 정작 설명하려는 사람이 시쳇말에 익숙치가 않으니 골머리를 싸맨다. 문해력 달린다고 요즘 청소년을 걱정하지만 책임의 절반은 기성세대 몫이라고 본다.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가야 아는 재미가 더할 텐데 애들 교과서가 마치 대학 교재처럼 여겨지곤 하는 건 내가 너무 과문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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